
“잘 잤느냐.”
아이는 여인의 얼굴을 보자 울음을 터트렸어.
“어머니가.. 어머니가..”
“괜찮다. 괜찮아..”
피 묻은 아이를 안고 몇번을 토닥였을까, 아이는 스르륵 잠들었어. 여인은 아이를 내려놓고서 붓을 들었어.

[사군자 중 ‘매’댁의 송씨 어르신께 올립니다. 범에게 당한 부모를 떠나 저에게로 온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온 흰 옷을 입은 사내가 어르신께 보내면 아이의 뜻을 펼칠 수 있다하여 이리 서신을 보냅니다. 신을 모신지 얼마 되지 않은 저도 느껴질만큼 힘이 강한 아이입니다. 힘의 원천은 타고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아이같습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세번째 동이 트면 어르신께 가겠습니다. -月香(월향: 달의 향기)]
월향은 찾아온 사내의 말대로 서신을 적어 보내고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보았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살 넘겨주며 중얼거렸지.
“가련한 팔자구나.. 어찌 그 선비께서는 사군자를 아신단 말인가. 영묘스럽고 강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으나 악한 자는 아니었다. 아가, 너는 어찌 그런 자와 연을 맺었느냐.”
*
그로부터 이틀 뒤 달이 밝게 뜬 밤, 붉은 꽃송이가 그려진 서신이 도착했어. 매화 댁 어르신으로부터 온 서신이였지.

[월향아. 꿈 새에 한 아이가 나왔는데 푸른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네가 데리고 있는 그 아이인 듯 하니 조심히 데리고 오거라. 아이가 편히 갈 수 있도록 가마 하나를 보낼터이니 너와 그 아이만 오너라. 또, 그 선비의 존재도 알아야할 것만 같구나. 행색을 잘 기억해두거라. -蘭(매)]
밖으로 나가보니 붉은 꽃이 달린 꽃가마가 놓여있었어. 월향은 웃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어.
“연화라 하였지? 우리는 내일 동이 트면 큰어르신께 갈거야. 저기 봐. 어르신께서 보내주신 가마란다.”

“..가마는.. 처음 타봐요..”
“고운 비단 옷을 입은 걸 보아하니 양반 댁 딸이였을터인데 어찌 가마 한 번 못타봤단 말이야?”
“…”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내일 어르신을 뵈어야하니 목욕 하고 가자. 이쪽으로 와.”
월향은 아이에게 친절했어. 아이가 일어났을 때 까진 무릎에 송진을 발라 치료해주고 부정 탄다며 입던 옷가지를 태운 후 고운 비단 옷으로 갈아입혀주었어. 며칠밖에 있지 않았지만 아이는 월향을 누이처럼 따랐지.
큰 욕탕에 들어앉아 꽃송이까지 올려진 탕 안에서 월향은 소매를 걷고 아이를 씻겼어.
“언니.. 큰어르신은.. 누구세요..?”
“매난국죽. 사군자를 대표해서 만든 정통있고 뿌리깊은 집안의 주인분들이셔. 내일 뵐 분은 그중 가장 큰 어르신인 매화 댁 어르신이고. 어르신들은 대대로 신을 모시고 계셔. 간단하게 생각하면 무당이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뭐가 다른데요..?”

월향은 아이의 팔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했어.
“나처럼 일반 무당들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신의 목소리로 도움을 주는데 사군자 어르신들께서는 신의 뜻을 받아 널리 전하는 분들이셔.”
“어려워요..”
“어렵지? 나도 처음 배울 땐 그랬어. 어르신들은 대부분 신의 뜻을 직접 받고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하셔. 옛부터 내려오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고 봐야지. 어르신들 댁에는 정말 많은 무당들이 살아. 거기서 자라며 그 집안의 무당이 되는거지.”
“그럼 저도 그렇게 되는거에요..?”
따듯한 물이 아이의 머리 위로 촤르르 쏟아지고 월향은 머리에 물을 꾹 짜서 흰 천으로 닦아주었어.
“그건 나도 몰라. 어르신께서 너를 보고 결정하시는거야. 그냥 신내림을 받고 나처럼 무당 일을 하거나 아니면 조금 특별한 일을 맡게될수 있어.”
“특별한 일은 뭔데요?”

“나도 잘 몰라. 나는 국화 댁에서 자랐어. 16살이 되던 해에 신내림을 받고 주변에서 지내다가 이 고을로 온 지 얼마 안됐거든.”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월향은 아이를 안아 욕탕 밖으로 꺼내 몸을 닦아주었어. 그러곤 가져온 비단 옷을 정성스럽게 입혀주었지.
“일찍 매화 댁으로 갈테니 오늘은 일찍 자자.”
“네. 언니.”
*
동이 틀 때 떠났던 가마는 해가 지고서야 큰 기와집에 도착했어. 가마에서 내리자 여러 하수인들이 두 사람을 안내했어.

“어르신.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제일 큰 문이 열리자 월향과 아이는 방 안으로 발을 들였어. 방 안에는 머리가 희고 긴 여인이 앉아있었어. 늙은 모습이 아니였지만 머리는희었지.
*

“영물을 가지고 태어났구나.”
“영물이요..?”
“날 때부터 가진 영물에 주인의 기운이 묻어있구나.”
아이를 빤히 보다가 손을 잡고 눈을 슬며시 감은 송씨는 천천히 눈을 뜨고서 말했어. 그러곤 이마를 살짝 쓸어주고 유과를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지.
“잠깐 나가있거라. 월향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 말과 동시에 하수인 하나가 들어와 아이를 데리고 나갔어.
“곱게 모셔라. 귀인이시니.”
“예. 어르신.”
문이 닫히자 송씨는 월향을 바라보며 말했어.
“저 아이가 가진 영물은 구슬이다.”
“구슬이요..?”

“아무래도 구슬의 주인이 저 아이를 지켜주는 듯 싶구나. 주인의 기운 때문에 타고난 재주를 가진 듯 하고.”
“그럼 아이를 데리고 계실겁니까..?”
송씨는 문 밖의 누군가를 보는 듯 창을 지긋이 보다가 마주앉은 월향을 보며 말했어.
“곧 창귀 하나가 집 안에 들어올거다.”
“이리 신성한 곳에..!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다. 창귀가 올 때면 벌써 범을 잡으러 갔을테고 여기에 얼마나 많은 무당이 있는데 그러느냐.”
“죄송합니다..”
“저 아이는 타고났다. 지금껏 보지 못한 인물이야. 너도 보고 가거라.”
*
달이 한가운데 떴을 때 대문이 열리고 끼긱 거리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아왔어.

“비키거라. 어르신께서 부탁하신 창귀니. 손이라도 닿으면 타고 들어가려 할 것이다.”
밖이 소란스러워지니 송씨의 문 앞에 서 있던 하수인 하나가 말을 건넸어.
“어르신. 태형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나가자꾸나.”
아이의 손을 잡은 월향은 송씨와 함께 창귀 앞에 섰어. 창귀는 끼긱대며 붉은 줄에 묶여있었고 한 남자가 송씨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어.
“범의 행색은 알았느냐?”
“예. 지금 정국이 범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렇구나. 고생했다.”
“..헌데 이 아이는 무엇입니까?”
“손님이다. 인사하거라.”

태형은 아이를 슬쩍 보고서 고개를 까닥인 후 송씨를 바라보며 예를 갖춰 물었어.
“이제 무얼 하면 됩니까.”
“창귀의 줄을 풀고 매실로 경계를 두거라.”
“예. 어르신.”
태형은 창귀의 옆으로 다가섰어. 목덜미가 다 붙어있지 않아 삐그덕대는 목과 뒤틀린 팔다리, 붉게 물든 눈을 가진 창귀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태형을 바라봤어.
태형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매실을 눌러 즙을 내고 이를 바닥에 둥글게 뿌렸어. 그러곤 묶었던 붉은 줄을 풀었지.
그러자 창귀는 게걸스럽게 흙바닥을 핥아댔어.
“되었습니다.”
태형의 일이 끝나자 송씨는 손짓으로 옆에 있던 이에게 상자를 가져오라 시키고 이가 도착하자 송씨는 마당에 모인 매화 댁의 무당들에게 외쳤어.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마당을 울릴 정도였지.

“범을 보는 구슬을 가진 아이다. 창귀와 독대하여 범을 알아낼 것이니!”
그러자 무당들이 웅성거렸어.
“독대라니. 죽고말거야.”
“저 아이가 범을 보는 눈을 가졌단 말이야?”
“범의 춤을 익히려면 족히 열 달은 꼬박 걸리는데 어찌 저 아이가 하겠어.”
“눈이라잖아.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어르신께서 농을 하시는 건 아닐까..?”
다른 무당들의 웅성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송씨는 아이이게 상자를 보여주며 말했어.

“창귀 앞으로 가 하고싶은대로 해보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