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WORTH IT COMPANY의 크루 미션을 위해 제작된 글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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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7월 25일
형원아, 오늘 네 장례식을 치렀어. 우리 반 애들이 모두 찾아와서 같이 울어줬다? 애들이 너를 그리워해 줘서, 너를 위해 같이 울어줘서 너무 좋았어. 그런데 나 좀 이상해. 애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줬는데, 오늘 심지어 열대야까지 왔다는데 난 왜 겨울 날씨보다 더 추울까? 왜 계속 오한이 들고 온몸이 떨릴까? 너가 없어서 그런 가봐. 제발 다시 찾아와서 내 옆에서 환하게 웃어줘. 네가 없으니까 나한텐 겨울만 남았어. 그것도 포근하고 몽글한 겨울이 아닌 냉정하고 날카로운 겨울만이.
25년 7월 26일
형원아, 신기해. 어제는 그렇게 추웠는데 오늘은 또 괜찮아졌어. 그냥 내가 어제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랬나 봐.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넌 거기서 편안하게 쉬고 있겠지? 아프지 말고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있어. 나도 곧 따라갈게.
25년 7월 28일
어제, 네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으려고 약을 먹었어. 일어나면 네 옆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천장과 벽이 날 반겨주더라. 병원이었어. 의사 선생님은 내가 생각보다 빨리 발견돼서 다행이라고 하더라. 형원아 금방 따라갈 게 조금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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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월 15일
형원아, 생일 축하해. 생일 선물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엔 못 줬네. 부모님께서 너무 많이 우셨어. 그리고 나보고 가지 말래. 나까지 잃고 싶지 않다고, 계속 날 붙잡고 계셔. 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조금만. 네 생일인데,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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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7월 27일
이번 연도엔 네 기일에 가족끼리 바다로 여행을 갔었어. 난 아침부터 몸이 안 좋기도 하고, 어차피 너도 없으면 재미도 없을 것 같아서 안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같이 가게 됐어. 그런데 햇빛이 그렇게 내리쬐는 곳에 있어도 정말 하나도 덥지 않은 거 있지? 정말 이상하고 또 신기하게 네가 죽었던 날에 나타났던 똑같은 증상이 나타났어. 손이랑 발이 어는 것 같고, 뼛속까지 찔러대는 그 아린 추위 때문에 파라솔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곳으로 가서 꽤 오랫동안 앉아있었나 봐, 식은땀이 나면서 눈앞이 뿌예졌는데 그 후로 기억이 잘 안 나. 그렇게 눈을 떴더니 오늘이더라. 열사병에 걸려서 오늘까지 앓았대. 난 추웠으면 추웠지, 덥지는 않았는데 열사병이래. 형원아 내 몸이 이상해 나 무슨 병 걸린 거 아니겠지?
26년 7월 29일
27일에 했던 여러 가지 검사 결과가 다 정상이라고 나왔어. 의사 선생님한테 내 몸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내가 춥다고 느낀 게 착각일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까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면서 속이 울렁거려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속을 게워냈어. 형원아, 나 진짜로 추웠어. 내가 이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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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1월 15일
벌써 우리 둘 다 반오십이 됐네. 형원아, 생일 축하해. 오늘은 네 생일 맞아서 내가 케이크 만들어봤어. 가족들이랑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다들 맛있다고 하더라. 너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아, 맞다. 너도 내 생일 때 케이크 만들어 준다고 했었잖아. 넌 평소에도 나한테 밥을 많이 해줘서, 네가 만든 케이크도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는데.. 이제 궁금해 할 수도 없게 됐네. 형원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내 생일까지만 조금만 더 버텨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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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7월 25일
형원아, 이번 연도에도 어김없이 추워. 이날마다 내가 이상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아. 오늘은 네 사진 보면서 힘내볼게. 네 사진 좀 많이 찍어둘걸. 보고 싶다. 채형원.

p.s. 나 사진 잘 찍었지? 이거 너 몰래 찍었던 사진이라 나중에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밖에 못 보여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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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1월 15일
형원아, 생일 축하해.
오늘은 네 생일을 맞아서 가족끼리 네가 좋아하던 음식들로 밥을 차려 먹었어. 너랑 나랑은 입맛이 완전 반대라 나는 네가 좋아하던 것들을 많이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먹어보니까 네가 왜 이 음식을 좋아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더라. 맛있는 음식 알게 해줘서 고마워 형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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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7월 25일
형원아, 너를 볼 수 없게 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어. 시간 진짜 빠르다. 그치? 작년 이날부터 오늘까지 하루하루 네 사진을 보면서 버텨왔던 것 같아. 그런 김에 추억 팔이 좀 해볼까?

이 사진 기억나? 한동안 우리끼리 엽사 찍어서 공유하고 그랬잖아ㅋㅋ 이때 참 재밌었는데, 그치? 이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 영상도 알지? 현민이가 찍어줬던 거ㅋㅋ 내가 개그로 학교 장기자랑 나갔었는데, 다른 애들은 싸늘하게 반응한 개그에 내가 민망할까 봐 넌 환하게 웃어줬잖아. 그때 진짜 고마웠는데. 그때는 이런 표현을 못 해줬던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 진짜 고마웠어.

오 이것도 있다! 이때 진짜 재밌었는데ㅋㅋ 너 눈 온다고 신나서 빨리 나가려고 슬리퍼 신고 갔다가 눈 다 들어가서 막 소리 지르면서 ‘발 시려! 발시려!’ 이러면서 눈싸움하고 놀았잖아ㅋㅋㅋ 그렇게 신나게 놀고 다음 날에 감기 심하게 걸려서 엄마한테 혼났었지. 그래도 지금 보니까 이런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록 감기 때문에 많이 고생했기는 했지만..ㅋㅋㅋ

짠! 이건 몰랐지?ㅋㅋㅋ 내 갤러리 둘러보니까, 내가 너 몰래 찍은 사진이 꽤 많더라? 이건 평생 간직해야지. 귀엽다 형원아ㅋㅋ
와… 오랜만에 좀 웃었다. 우리 되게 많이 싸웠었는데, 그래도 꽤 좋은 추억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난 네 사진 조금만 더 보다가 잘게. 추워서 잘 잘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보려고 노력할게. 잘 자, 형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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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11월 23일
형원아, 오늘 하영이가 나한테 고백했어. 너도 알지? 내가 예전부터 하영이 많이 좋아했었던 거. 하영이한테 들어보니까, 그동안 네가 우리 둘 사이에서 연애상담해 줬더라?ㅋㅋ 우리 둘 얘기 다 들어주고 비밀로 지켜준 거 너무 수고했고, 고마워. 그동안 내가 네 기일마다 힘들어할 때 하영이가 옆에서 많이 도와줬었어. 처음엔 하영이가 있어줘도 많이 힘들었는데, 점점 괜찮아지더라. 형원아. 우리 사귀기로 했어. 축하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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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1월 15일
형원아, 생일 축하해. 오늘 하영이랑 같이 네 생일 파티를 했어. 우리 셋이 같이 찍었던 사진 보면서 되게 재밌게 보냈는데, 너도 우리 보면서 즐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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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7월 25일
형원아 이번 연도에도 추운 건 어쩔 수 없나 봐. 이 한여름에 난방을 그렇게 틀어놔도 전기장판을 틀고 그 안에 들어가 있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래도 이번엔 하영이가 있어서 조금은 나은 것 같기도 해. 다행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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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오늘도 편지 써?“
“응, 오늘 형원이 기일이니까..“
“형원이는 좋겠다. 이렇게 매년 편지 써주는 사람도 있고.”
“하영아,”
“응?”
“너도 형원이한테 편지 한번 써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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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7월 25일
안녕, 형원아. 나 하영이야. 오랜만이다. 그치? 음.. 편지 쓴 지 좀 오래돼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ㅋㅋ 형원아. 서원이, 이렇게 글은 멀쩡하게 쓰고 있어도 이날마다 너무 괴로워해. 너한테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저렇게 글은 쓰고 있어도 자기가 한여름에 추워한다는 게 정신적 문제는 아닐까, 어디 병 걸린 게 아닐까, 희귀병이 아닐까 하면서 계속 무서워하고 있어. 형원아, 그래도 난 널 원망하지 않아. 서원이는 저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이 증상 때문에 매년 널 기억할 수 있다고 좋아해. 그래서 원망하지 않아. 그래도 서원이가 추위를 조금은 덜 느낄 수 있게 도와줘. 벌써 4년째잖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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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영이가 형원이에게 편지를 쓰고 난 다음 연도부터 형원이의 기일에 나타나야 할 오한 증상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증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내가 형원이를 잊은 것은 아니다. 서영이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이를 낳고 나서도, 형원이의 기일마다 형원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쭉 지켜본 이제 5살이 된 내 아들 하민이도 형원이를 본 적은 없지만, “형원 삼촌 형원 삼촌” 하며 기특하게도 그 자그마한 손으로 꼬불꼬불 귀엽기만 한 글씨를 써 내려간다. 아빠가 형원 삼촌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민이도 그래서 삼촌이 좋다는 내용을 말이다. 이제 곧 형원이에게 쓴 편지를 모아, 책을 만들 예정이다. 마지막 페이지엔 하민이가 형원이에게 쓴 편지까지 넣는 게 내 계획이다. 이 책을 출판할 생각은 없지만, 좋은 종이로 내가 그동안 썼던 편지를 엮어,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딱 하나만 만들려고 한다. 책의 제목은 ‘여름이 지나가고, 다른 여름이 찾아오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