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 [Serial discontinued]

NO.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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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GAME

NO. 09

W. 설하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가만히 굳어있는 대신, 아니라고,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등의 변명의 말이라도 입에 담았더라면, 진의 얼굴이 그토록 처절하게 일그러지는 일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은 내 알량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동생을 잃은 오라비의 표정이, 그 일그러진 표정이 너무나도 처절해서, 슬픔이 한가득 묻어나는 것이 안쓰러워서, 그래서 입을 열지 못했을 뿐이었다.

"…네가 율리아가 아니라면,"

"……."

"그럼,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거니…,"

그가 울었다. 자꾸만 눈물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 물음이었다. 내가 누구냐는 물음조차 나는 대답할 수 없는데, 율리아의 행방이라고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손에는 내가 로시아에게 받아온 총이 들려있었다. 그 총구는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걸 쥐고 있는 진의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가 내게 저 총을 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율리아의 가족이기 때문에. 동생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라, 지금 제 눈앞의 사람이 동생의 탈을 쓴 사탄이라 해도 총을 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진의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눈물을 흘리다가도, 총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뒤, 부릅뜬 눈으로 날 죽일 듯 쳐다보며 다시금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누구냐고. 막냇동생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율리아의 흉내를 내는 너는 누구냐고. 넌 율리아가 아니라고. 나는 그 말들을, 진이 쏟아내는 수많은 감정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덤덤했었나? 아마 아닐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혼란스러워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

"……."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난 '율리아'가 아니야."

확답,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 진이 무너졌다. 애써 흐느낌을 참는 듯한 모양새로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린다. 마치 아이처럼.

"그럼 그 아이는, 율리아는, 어디에 있지?"

"…그건, 나도 몰라."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그날 새벽 내도록 진은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더욱 슬펐다. 그럼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위로 따위는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곁에 주저앉아 그가 울음을 그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진은 물었다. 율리아가 죽었느냐고. 나는 망설였다. 나는 율리아의 존재에 대해 모른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내가 그녀의 몸에서 눈을 뜨기 직전, 그녀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심지어는 왜 내가 그녀의 몸을 눈을 뜨게 된 것인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에게 단 한 가지만은 약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목적이기도 했으며, 어찌 보면 오기이기도 한, 그런 진득한 맹세였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율리아에 대해서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내가 율리아로 눈을 뜨게 된 건 내 의지가 아니야."

"……."

"그래도 하나는 약속할게. 네 동생을 돌려놓기 위해 난 최선을 다할 거야."

"…율리아를,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소린가?"

"사실 확신은 못해. 하지만 내가 목표로 하는 것에 율리아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겠어."

어느덧 눈물을 그친 그를 보며 나는 말했다.

"네 동생만큼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되돌려놓을게."

그것은 그간 진이 보여준 호의와 애정에 대한 보답이었으며, 내 알량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IN GAME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그간 되지도 않는 율리아를 흉내 낸답시고 얼굴에 걸었던 웃음기는 이미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애초에 진에게 다 들킨 마당에 그 앞에서 그런 우스운 가면을 쓰고 있을 이유도 없긴 했다. 그럼에도, 나는 진의 옆자리에 아주 태연하게 앉아있는 남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알엠이 물었다. 불과 어제저녁에 내 동생이네 뭐네, 난 네 오라비일 뿐이네 했던 인사가 앉아있기에는 좀 우스운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제 옆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홍차를 들이키는 동생을 향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결국 내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알엠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뭘? 네가 율리아가 아니라는 거? 하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네. 놀란 모습은 태연한 얼굴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 것으로 보아하니 내가 율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언제부터 알았어?"

"글쎄, 아마 네가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말하던 날부터 아닐까."

"…어떻게 알았는데?"

"사람의 감은 때때로 아주 정확하게 위화감을 잡아내지.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진 형까지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난 생각보다 너를 좀 더 집요하게 관찰했거든."

"……."

"예를 들면 습관이라던가, 말투라던가, 식성이라던가, 앉는 자세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야."

"……."

"대표적인 예로, 율리아는 앉아있을 때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두는 습관이 있었지. 너처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두는 게 아니라."

나는 테이블에 너저분하게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었다. '율리아'의 사소한 습관까지 내가 기억할 리 없으니, 테이블에 손을 올려두는 것은 온전한 '나'의 습관이란 뜻이었다. 기억상실, 드라마 소재로나 쓰이던 것을 들먹였을 때 어쩐지 너무 잘 먹힌다 싶더라니, 되려 내가 속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공작 부부 내외께서도, 알고 계실까?"

실상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그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만 봐서는 영락없이 율리아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긴 했으나,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알엠만 하더라도 내게 꼬박꼬박 오라비 행세를 하며 잘 대해주지 않았던가.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론 이 또한 온전히 '나'의 습관이었다.

"아니, 모르실거야. 두 분은 생각보다 네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니까."

진이 내 손을 잡아내리며 말했다. 그는 짧게 뜯긴 내 손톱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제 품에서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꺼내 엄지손가락에 맺힌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율리아와 가까이 지낸 건 우리였지. 두 분은 바쁘시기도 하고, 보통 딸의 사소한 습관을 모두 기억할 만큼 큰 관심을 두는 부모는 잘 없으니까."

그런가? 나는 막 병상에서 일어난 나를 대하던 공작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까지의 애지중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지고 있던 모습 아니었나? 어제도, 북부에서 돌아온 율리아를 퍽 애절하게 맞이했던 그들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율리아에게 다정한 부모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앞으론 어쩔 생각이야?"

알엠이 물었다. 나는 그가 가져온 스콘을 한입 퍼먹으며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다닐 거야, 하는 내 대답에 두 사람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마치, 네게 아카데미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한 물음과도 같아서, 나는 내가 아카데미에 가야 하는 이유, 즉, 메인 퀘스트 따위의 복잡한 것들에 대해 그들에게 설명하는 대신 그들에게 아주 잘 먹힐만한 변명을 내뱉었다. 율리아를 되찾아올 방법이 아카데미에 있는 것 같아. 내 말에 그들은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사라진 동생을 되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비뚤어진 신뢰, 나에게 그들이 가진 믿음이 그랬다.

"시험 결과는 발표 전 아닌가?"

"오늘이 발표날이야."

"아하, 그렇다면 서신이 왔을 텐데."

미아는 내게 도착한 서신은 없다고 했다. 못해도 내일쯤엔 오지 않을까? 하는 여유로운 생각을 하며 스콘을 마저 입에 넣었다. 치즈의 고소한 향이 입안에 가득 맴돌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짓고 있던 알엠이 돌연 입을 열었다. 율리아, 만약에-,

"아카데미에 불합격한다면, 앞으로는 어쩔 셈이지?"

아, 불합격. 확실히,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반쯤 책상에 엎어진 채로, 포크로 스콘 부스러기를 쿡, 쿡, 찔러대며 생각했다. 글쎄-, 하며 늘어지는 내 대답에 두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글쎄, 뭐든 하겠지?"

"……."

"……."

시선이 따끔거렸다. 설마, 그게 계획의 전부는 아니겠지?라고 묻는 듯한 그 눈빛들을 받아내다 나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며 툴툴거렸다.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아 줄래? 하는 내 원망 어린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떨어졌다.

"사실, 별로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불합격이라 해도 일단은 북부로 갈 거야."

"…아카데미에 네가 찾는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확신이 아니라 추측일 뿐이야. 그리고,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잖아?"

내가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메를린 아카데미의 어엿한 재학생으로써 자리하고 있는 진이 있는데, 필요하다면 그의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아카데미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불합격일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진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나는 그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아카데미의 서신을 뜯어보는 것 만이 입학시험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겠지만, 난 아니었다. 무려, 이 세계에서 '치트키' 급으로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뭐 하러? 추격전에서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던 시스템을 내가 괜히 치트키라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

필수 퀘스트

당신은 [전직]을 무사히 완료하였습니다.

'메인 퀘스트'의 진행 자격이 부여됩니다.

크레아 제국의 중심

'메를린 아카데미'

당신은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제국을 비롯한 대륙 전체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에 대한 것을

조사해야 합니다.

아카데미 입학일 : 제국력 117년 4월 1일

제한 시간 : 0D 9H 1M

완료 조건 : 아카데미 입학시험 합격 (완료)

퀘스트 완료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들어온 미아의 손에 들려있던 편지를 건네받았다. 페이퍼 나이프로 갈라낸 봉투 안에 들어있던 서신을 천천히 읽어내린 나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진과 알엠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율리아 비안 오르테 공녀님께,

귀하의 아카데미 입학시험 결과를 안내드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해당 서신을 발행하오니, 귀하께서는 해당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시길 바랍니다.

제국력 117년 3월에 실시한 입학시험에서 귀하는…

·

·

·

…하여, 메를린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인재상에 귀하가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바, 귀하의 아카데미 입학을 허가하였음을 알립니다.

메를린 아카데미'

/

메를린 아카데미의 정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새 학기가 시작됨으로써 다시금 학교로 돌아온 재학생들부터, 그 어렵다는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어깨가 하늘로 치솟은 수많은 신입생들까지. 나는 그 광경을 조금 질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더니, 어째서인지 이 광경을 예전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익숙하게 길을 찾는 진의 뒤를 쫄래쫄래 쫓으며 나는 길을 익혔다. 공작 부부 내외와 알엠은 아카데미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함께하지 않아, 나는 또다시 진과 둘이서 북부로 올라온 참이었다. 형이 있는데 굳이 자기가 함께 가야겠냐며 공작 저에 남은 알엠은 그렇다 치더라도, 막내딸을 그토록 아끼는 모습을 보이던 공작 부부마저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 가족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되며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운함 따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위화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진이 날 데리고 도착한 건물은 기숙사였다. 입학식이야 뭐, 참석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자리인데다, 제국의 단둘뿐인 공작가 중 하나인 오르테 공작가에, 무려 소공작과 공녀가 자리해있단 소문이 자자한 지금, 입학식에 참석해 봤자 피곤해지는 건 우리였다. 해서, 마차에서부터 입학식은 참석하지 말자는 쪽으로 말을 마친 후였다. 진이 기숙사 호식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합격을 통지하던 서신에 적혀있던 바에 따르면, 나는 A210호였다. 진이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건데, 언제나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해. 오르테 공작가는 제국 내에서 큰 주목을 받는 가문이니, 네 행실 하나하나가 죄다 가십거리로 떠돌아다닐 거야. 그러니까 더더욱 조심해야 하고,"

"응."

"그리고, 되도록이면 네가 그, … 그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하는 일들을, 나에게도 알려줬으면 좋겠어."

그 방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별다른 말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진짜 율리아를 찾아내는 방법.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 일부러 모호하게 말한 것일 터였다. 눈앞에 율리아가 있는데, 율리아를 찾는 모습은 그 누구라도 수상쩍게 볼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기숙사는 1인실이었다. 아카데미가 교내에서의 계급, 신분에 따른 특혜와 차별을 없애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 따른 차이는 어디에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이 기숙사처럼. 돈이 많은 이들이야 1인실을 사용하는데 치러야 할 대금 정도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낼 수 있겠지만 그게 어디 평민들에게도 가능한 일인가. 가난하다거나, 여력이 없는 이들은 별 수없이 다인실에서 생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겐 아카데미에 다닐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운을 다 끌어 쓴 셈이었다.

진은 들고 있던 내 짐가방을 열어 차곡차곡 방을 정리했다. 공작가 도련님의 손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깔끔하고 익숙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걸로 연락하면 돼."

둥그스름한 하얀 보석을 건네며 진이 말했다. 언뜻 보기에 진주 같기도 한 이것은 통신석이라고 했다. 마땅한 연락 수단이라고는 편지가 전부인 이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휴대전화와 비슷한 성능을 낼 수 있는 것. 그러나 가격이 가격인지라, 역시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물론, 오르테 공작가는 통신석을 여럿 구비해둘 정도의 재력은 가지고 있었다.

"가볼게, 나중에 봐."

"잠시만, 네 기숙사는 어딘데?"

혹시나 진에게 급하게 찾아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내 물음에 진은 살풋 미간을 찌푸리더니, A507호라고 대답했다. 방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방 문을 닫기 직전에서야 입을 열었다. 

"호칭은, 원래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푹 쉬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을 닫아버리는 진에 나는 멀거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진의 귀가 떠올랐다. 호칭? 그제야 나는 진에게 율리아가 아님을 들킨 뒤로 쭉 '너'. '저기' 따위의 호칭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오라버니라고 부르라는 건가. 그게 그렇게 쑥스러워할 일인가? 나는 멀거니 서서 '오라버니'하는 단어를 몇 번 입에서 굴려보다 몸을 움직였다.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를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메를린 아카데미의 '자료'에 접근하기 위해

타인의 협력은 필수불가결합니다.

아카데미의 '플레이어'들을 모두 찾으십시오.

찾아낸 이들과 협력 관계를 맺고,

플레이어들 간의 '연합'을 생성하십시오.

단,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

완료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제외됩니다.

성공 보상 : 진행률에 따른 차등 지급

실패 시 : 페널티 없음

제한 시간 : 13D 12H 49M

남은 플레이어 : 7

진행률 : 14%

제외된 플레이어 : 1

새로운 [메인 퀘스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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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따끔거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느껴질 정도의 시선들이었다.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는 시선들을 받으며, 나는 입학식 날 진이 했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문의 중심이 될 거야. 그 말이 이렇게 노골적인 시선들마저 모두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바였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카데미에서 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다.

고작 3일이었다. 3일 만에, 나는 내가 평생을 살아도 다 받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관심을 받는 중이었다. 제국의 두 개뿐인 공작가, 오르테 공작가와 벨리시아 공작가. 폐쇄적인 두 공작가의 특성상, 아카데미라는 화려한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율리아 비안 오르테'라는 존재는 수많은 이들에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공녀라는 지위가 이렇게 피곤한 거였나, 공작저에서 놀고먹기만 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뜨거운 관심 덕분에, 내 메인 퀘스트의 진행률은 여전히 14%에 그쳤다. 이렇게 주목을 받아서야, 몰래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라도 보였다가는 제국에 '오르테 공녀가 아카데미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하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능하기는 할까? 막막한 앞날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찾아봤어?"

여하튼, 이러한 복잡한 사정 덕분에 아카데미 내 '플레이어'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김태형이 맡게 되었다. 그 역시 루미안 후작가의 차남으로, 충분히 세간의 관심을 모을 법한 지위였지만, 알려지지 않은 얼굴 덕분에 아카데미 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물론, 그 시선들을 죄다 내가 끌어온 것도 한몫했다. 태형의 눈가가 거뭇했다. 우리를 제외한 플레이어가 7명이나 되리라는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기에, 플레이어를 추려내는 일이 더 막막해진 듯싶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네가 날 알아봤던 것처럼, '시스템'을 다루는 모습과 유사한 행동을 한다던가, 우리처럼 누군가를 몰래 찾고 있다던가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

자연스레 내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후작가에서 반쯤 내팽개쳐지듯 한 처지라, 그는 피치 못하게 2인실을 쓰고 있어 내가 그의 기숙사로 가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자연스레, 내 방으로 김태형이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나는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플레이어'로 추측되는 이들, 어림잡아 20명쯤 되는 인물들의 정보가 종이에 적혀있었다.

"…황태자?"

"꽤 유명하더라고,"

개중에는 크레아 제국의 황태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의 황자, 황녀들 역시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현 황제마저도 메를린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점은 공작 저에 처박혀 역사 책만 주야장천 읽을 적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나, 나와 같은 학기에, 심지어는 같은 학부에 그 '황태자'가 입학했노라 하는 사실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물론 그 '황태자'가 플레이어와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는 소식 역시도.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플레이어와 관련이 있을까?"

"그러는 너도 공녀님이고, 나도 직위로만 따지면 후작가 차남으로 낮은 편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그분이 어떤 이유로 우릴 선택한 건지 몰라도, 선택한 사람들 중 황태자가 없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주변 사람을 과하게 관찰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라."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동이긴 하지."

나는 종이를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많고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플레이어를 찾아내라니, 그것도 단서라곤 하나도 없이. 이번 퀘스트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머리를 암만 굴려봐야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르겠다, 일주일 넘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 사이에 뭐라도 하겠지. 실패 시 페널티도 없겠다, 조금 더 천천히 지켜봐도 될 일이었다. 나는 소파에 반쯤 파묻힌 자세로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침대에 걸터앉기만 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도 반쯤 누운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해 보였다.

"일단, 나도 이 사람들을 조금 더 주시하기는 할게. 문제는, 어떻게 '플레이어'임을 확신하느냐인데…,"

"그건 나도 생각 중. 여긴 사도 재판이 있다며? 말 한번 잘못했다가 이교도로 몰려 사형당하는 엔딩은 피하자고."

태형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마따나,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네가 '플레이어'냐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수도, 더 넘어가서는 이교도 취급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안전하고, 좀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단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시간은 많으니까."

10D 5H 23M, 시간은 차고 넘친다. 아니, 설령 부족하다 치더라도 남은 시간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똥줄 타는 건 비단 김태형과 나만의 일은 아닐 테니, 되려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어느새 걸터앉아있던 침대의 가장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해둔 김태형이 돌아갈 채비를 했다. 들어올 적과 같이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쓴 그가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하는 인사말만을 남기고 금세 떠난 김태형에, 방 안은 정적만이 흘렀다.

김태형이 두고 간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한 명, 한 명, 누가 누구이며, 어떤 행동을 보였고, 이러이러한 점에서 '플레이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함, 따위의 말을 전부 읽어나갔다. 종이에 적힌 정보들을 통째로 외어버릴 것처럼, 나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의 정보를 내 머릿속에 꾸역꾸역 눌러 담았다. 시간은 많다. 그러니,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확신'까지 얻어내리라.

그리고, '시간이 많다'라는 생각이 그저 내 오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불과 하루 뒤의 일이었다.

[알립니다,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은 학생들은 서둘로 본인의 기숙사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반복된다. 겁먹은 눈동자들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다급한 발걸음이 수도 없이 내 곁을 지나친다. 공포, 그리고 두려움. 그 선연한 감정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허둥대는 공간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으며, 그 한가운데서 나는 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이 붉었다. 검붉은 색상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누군가 바닥에 붉은색 물감을 풀어둔 것 같았다. 그것이 물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은 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은 학생들은 지금 즉시…]안내방송이 몇 번이고 다시 울린다. 이윽고 그것은 커다란 소음이 되어 내 귀를 괴롭힌다. 나는 멍하니, 눈앞에 띄워져 있는 새파란 창을 바라본다.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를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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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시간 : 13D 12H 49M

남은 플레이어 : 7

진행률 : 14%

제외된 플레이어 : 1

사망한 플레이어 : 1

학생이 죽었다. 메를린 아카데미 사상 처음 일어난 참극에 교수들조차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죽은 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점점 바닥을 적셨다. 넓게, 더 넓게,

'아리아 비엔타'

죽은 학생은 '플레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