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 [Serial discontinued]

NO. 10

Gravatar


IN GAME

NO. 10

W. 설하

TRIGGER WARNING!

유혈 주의,

잔인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아 비엔타',

그녀는 소위 말하는 '몰락 귀족'의 표본이었다. 작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이름뿐인 귀족. 비엔타 남작가의 재정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전대 남작이 도박으로 재산을 죄다 탕진해버린 뒤였기에 비엔타 남작가가 이름뿐인 귀족으로 무너진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은 건 빚뿐인 남작가에서 태어난 아리아 비엔타는, 총명한 두뇌와 빠른 상황 판단력 덕에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너져가는 가문의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던 남작가에서,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침묵을 택할 거야. 아니면 사고사나 자살로 위장할 수도 있겠지만."

태형이 말했다. 유례없는 살인사건, 아리아 비엔타의 시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감히 사고나 자살 따위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칼에 급소를 찔렸다고 해서 피가 바닥을 적실 정도로 새어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리아 비엔타가 발견되었던 복도 끝은, 바닥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은 시체. 그걸 보고 '사고사' 또는 '자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교수들은 벌써부터 학생들 입단속한다고 나서던걸,"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간 오백 년의 영예가 그대로 진창에 처박힐 테니까. 어디 그냥 단순 살인 사건이야? 집안을 말아먹게 된 원인이라 해도 사람을 그 꼴로 만들 순 없는 법이야."

눈앞에 그 끔찍했던 참상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피로 물든 바닥, 눈을 감지도 못하고 부릅뜬 채 죽어있던 아리아, 찢어발겨진 옷들과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선혈들, 얼굴부터 발끝까지 성한 구석이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한 그 모습을. 생각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짐승에게 당했다 해도 시체가 그 꼴이 나진 않을 것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처절하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단 뜻이었다.

대체 누가, 왜, 어째서 그녀를 죽여야만 했을까,

"…아직 추측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야, 너무 공교롭지 않아?"

걸리는 게 많단 말이지,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이상하게 여겨질 만한 게 한두 개가 아니지."

"비약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만약에, 정말 만약에 아리아 비엔타가 죽은 이유가 '플레이어'와 관련되어 있다면?"

아리아 비엔타, 그녀는 플레이어였다. 공교롭게도 퀘스트와 맞물리는 그녀의 죽음, 그녀가 죽자 퀘스트 창에 나타난 '사망한 플레이어'라는 문장, 그리고 늘어난 수. 전에 없던 살인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우리가 부여받은 퀘스트와 연관 짓는다면? 수많은 가설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채워나갔다.

"그녀가 죽은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가장 유력한 이유는 3가지가 될 거야."

"……."

"하나, 우리가 모르는 이유, 아리아 비엔타 혹은 비엔타 남작가와 관련된 원한, 혹은 모종의 이유 때문에 누군가가 그녀를 죽였다."

"시체의 훼손 정도를 보면 거의 가능성이 없긴 하지만 말이야."

"맞아, 그럼 둘, 플레이어인 그녀가 받은 퀘스트의 실패 패널티가 '사망'이었다. 그녀가 퀘스트 완료에 실패해 패널티를 받은 것뿐이다. 우리가 돌발 퀘스트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야. 전직 때와 같이 패널티가 사망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

"누군가가 플레이어, 혹은 아카데미의 학생을 노리고 있는 경우."

단검을 손가락으로 굴리던 김태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선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을 스쳤다. 단검을 내려놓은 김태형이 다리를 꼬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깊게 파고들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기다려볼까.

톡, 톡, 일정한 간격으로 손가락이 테이블을 건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아 비엔타' 개인의 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 치부한다면, 김태형과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세계에도 수사관은 존재하니, 차라리 그곳에 맡기는 게 맞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와 그 죽음이 플레이어와 연관되어 있다면? …글쎄, 그래도 굳이 우리가 나서야 할까? 그녀의 죽음에 대해 들쑤시고 다니는 일이, 되려 우리를 범인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런 연줄도 없는 남작가의 여식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오르테 공녀와 루미안 후작 영식이라, 의도가 어떻든 한번 불어나기 시작한 소문은 살을 붙이기 마련이다. 되도록 질 나쁘고, 안 좋은 쪽으로. 나서봤자 좋은 결과는 못 얻는다는 소리였다.

"있잖아, 난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야.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실은 그 반대에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정의에 관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

"솔직히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면, 넌 어쩔래?"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내 목표는 오로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 하나였으며, 그 과정에서 원래의 율리아 또한 무사히 되돌려놓는 것까지 가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와도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누군가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설 용기는 내게 없으며, 사명감에 불타 범인을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둥의 다짐을 할 생각도, 내겐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내 생각을 읽는다면 비겁하다,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쏟아낼 수 있을 법한 생각들이었다. 김태형이나 내가 나선다면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일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한 행동을 저지함으로써 칭송받고 선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며, 최소한 아리아 비엔타의 죽음을 억울한 무언가로 남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우리는 그를 처단함으로써 수많은 위험들을 안고 가야 할 것이다. 그 악인의 뒤에 누가 있는지, 이 사건이 단연 한 사람만이 벌인 일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판국에, 나와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이 일에 굳이 나서서 미래를 가시밭길로 만들 필요가 있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눈앞의 악을 처단함으로써 잠시간의 칭송과 불안정한 미래를 얻게 된다면, 나는 그보다 더 먼 미래까지 내다본 후 결정을 내리리라.

나는 김태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그가 나서고 싶다 하면 함께 나서줄 의향은 있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는 낯선 세계에 유일한 공통점을 가진 동료 아닌가. 선인으로써 걷게 될 가시밭길 정도야, 둘이서 함께 걸으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싶은 것이었다. 김태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

"우리는 적당한 때를 노리는 걸로 하자고."

끝까지, 끝까지 기다렸다 가장 적절할 때 나서리라. 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린 김태형을 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IN GAME

'아카데미는 이 사건을 덮으려 할 것이다.'라는 태형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아리아 비엔타의 죽음은 사고사로 위장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인적이 드물기로 유명한 서관 1층 복도의 끝자락. 북부의 높다란 산맥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장소였기에 그럴듯한 사고 경위를 지어내는 것은 쉬울 것이었다. 아카데미와 인접한 산에서 들짐승이 출연, 아카데미 내까지 들어와 난동을 피웠으나 아카데미의 경비대에 의해 바로 진압, 그 과정에서 아리아 비엔타는 안타까운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음. 완벽한 극본이었다. 그러나 아카데미 내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나와 김태형이 그 사건에 대해 입을 닫고, 나서지 않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정말 멍청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퀘스트를 우선으로 하되, 범인의 목적이 플레이어일 수도 있으니 너무 나서지는 않을 것. 적절한 선을 그어두고는 그 선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먼젓번에 뽑았던 플레이어로 추측되는 인물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본다던가, 시스템의 사용법을 좀 더 연구해본다던가 하는 것들을.

"SP는 스탯 포인트의 약자. 스킬창을 열면 남은 스탯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어. 이걸로는 패시브 스킬이나 다른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는데, 1레벨 올리는데 필요한 스탯 포인트는 1이야. 포인트는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레벨이 오를 때마다 조금씩 줘,"

"잠시만, 스탯 포인트를 쓴 적이 없는데 스킬은 레벨이 꽤 올랐는데?"

"그건 네가 몸을 어느 정도 사용하느냐에 따라 레벨이 오르기도 해. 근데 솔직히 좀 짜게 오르거든. 스탯 포인트로 올리는 게 편해."

"패시브 스킬들은 사용하면 막 저절로 공격되는 건가? 게임처럼 막, 화려한 이펙트도 나오고 그렇게?"

"…이게 진짜 게임도 아닌데 되겠냐?"

김태형은 꽤 괜찮은 선생이었다. 한때 PC방에서 살다시피하며 게임을 했던 전적이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듯했다. 덕분에 튜토리얼 없이도 시스템이 적응하는 것이 쉬웠다.

"솔직히 몸을 직접 써보는 게 훨씬 좋을 텐데, 넌 총이라 좀…, 애매하네."

김태형이 단검을 높게 던졌다 받으며 말했다. 그의 직업은 리퍼, 단검을 주로 사용하는 암살자 직업군. 두 개의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는 묘기에 가까운 그의 행동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총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들고 다닌다거나 손에 쥐어 본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총을 직접 쏴본 적은 딱 한번밖에 없었다. 전직했을 때 한 번. 문제라면 문제일까, 사실 정말 총을 사용해야 할 일이 왔을 때 내가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총이 불발된다거나, 명중시키지 못한다거나 하는 부차적인 문제들이 내게는 더 문제였다. 그런 일을 대비해서 일단 로시아에게 다양한 총을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여러 개 맡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아직 제대로 된 수업을 받는 것도 아니니 훈련장은 내어 줄 수 없다 하고, 그렇다고 방…에서 연습을 하는 건 무리고."

군사학부, 굳이 이 험한 학부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타 다른 학부들과는 다르게 몸 쓰는 일이 많은 학부, 따라서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훈련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받아낸 등록금을 알차게도 처바른 덕에 개인 훈련장은 매우 튼튼한 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제국의 기사단장이 와서 활개를 쳐도 흠집만 나고 말 정도라니까. 그만큼 정비가 잘 되어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내가 그 벽에 아무리 총알을 쏴댄다고 한들, 건물이 무너진다거나 벽이 부서진다 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입생들에게는 개인 훈련장이 배정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총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직업을 골라놓고 총 한 번 제대로 못 쏴본 신세가 되었고.

부여되는 메인 퀘스트조차 평화롭기 그지없는 내용들이라 나는 총 쓰는 연습을 하지 못했다는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랐다. 언제 어디서 목숨을 위협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훈련이 필요했다. 비교하자면, 칼 한 자루 들고 총든 군사들이 가득한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 군인의 심정이랄까. 초조함에 총의 손잡이만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김태형이 제 허리춤에 달려있던 단검 하나를 건넸다. 자,

"정 못쏘겠다 싶으면 일단 이거라도 써. 총이야 빗맞으면 끝이지만, 칼은 5살 어린애한테 쥐여줘도 누군가를 찌를 수 있는 무기거든."

나는 그가 내민 단검을 받아들었다. 날이 잘 관리된, 은색의 예쁜 단도였다. 후작가 영식답지 않게 빈곤한 김태형의 주머니 사정을 알고 있는 내가 이런 칼을 어디서 구했냐 물으니, 그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하는 것이었다.

"훔쳤지, 후작가에서."

따지고 보면 제 집의 재산일 텐데, 그걸 훔쳤다고 표현하는 그가 새삼 웃겨서, 나는 꽤 오랜만에 크게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아리아 비엔타가 살해당한지 고작 이틀 뒤의 일이었다. 칸나 이프게니, 이프게니 백작가의 영애. 사인은 아리아 비엔타의 것과 동일했다.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방치되어 있는 시체. 얼굴마저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어 신원을 파악하는 것이 꽤 오래 걸렸을 정도였다.

"조용히 해결하긴 글렀네."

"…글러먹었지, 이제 확실해진 셈이잖아."

"그래, 범인이 '플레이어'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를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

·

·

제한 시간 : 7D 4H 19M

남은 플레이어 : 7

진행률 : 14%

제외된 플레이어 : 1

사망한 플레이어 : 2

칸나 이프게니가 살해당함과 동시에 퀘스트 창의 숫자 또한 올라갔다. 사망한 플레이어, 2명, 아리아 비엔타와 칸나 이프게니. 혹시나 했던 가설들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범인은 플레이어를 노린다. 다음 살인사건의 희생양이 내가 될 수도, 김태형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저녁엔 진이 다녀갔다. 연달아 일어난 살인사건에 그 또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혼자 다니지 말라는 말부터,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둥, 방문은 항상 잠그고 있으라는 둥의 잔소리를 한참이나 퍼부어댔다. 물론, 진은 알지 못할 테지만, 그 살인사건과 내가 아주 약간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러니까 다음 희생양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감이 꽤 정확한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알면 당장에 기겁하며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어쩔까, 이번 퀘스트는 안 그래도 까다로웠는데, 더 까다로워진 셈이야."

"솔직히 그냥 실패했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잖아. 봐, 남은 플레이어는 아직도 7명이야. 진행률은 14%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돌아오지 않는 이상 퀘스트 완료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지."

"실패 패널티가 없으니 다행인가?"

"전혀, 조금만 생각을 해 봐도 패널티 없음이 정말 패널티가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잖아."

"…왜?"

"시스템이 협력 따위를 메인 퀘스트에 내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내 물음에 김태형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 위로 가위표를 그리며 말했다. 칸나 이프게니의 이름이 지워졌다.

“사실 플레이어들을 모아놓고 이루고 싶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시스템은 퀘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플레이어들 간 협력이 없다면, 그 목표는 달성하기 아주, 아주 어려운 과제가 될 거라고.”

“…….”

“그렇다면 실패 시 패널티 없음은? 생각해 봐, 이번 퀘스트를 실패한다는 게 뭘 뜻하지?”

“그거야…, 플레이어들을 충분히 포섭하지 못했다는…, 아,”

“그래, 플레이어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했어. 다시 말하자면, 협력자를 잃은 거야. 자연스레 플레이어들의 힘은 위축되겠지. 그게 가장 큰 패널티인거야. 플레이어들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이. 그리고 이 가정을 지금 상황에 대입해보자고.”

퀘스트 창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플레이어는 총 10명, 10명의 힘을 100%로 볼 때, 이미 낙오자 1명으로 인해 전력의 10분의 1을 잃은 셈이니 남은 전력은 90%.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2명이 죽어나가며 남은 것은 고작 70%의 전력이다. 그마저도, 남은 7명 모두가 협력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계산이었다.

“70%라도 아등바등 지켜내야겠지.”

“아니, 아니야.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지 않아?”

“…?”

“생각해 봐. 여태 죽은 두 명은 모두 플레이어였어. 그들을 죽인 범인이 일단 이 시스템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목적이라는 것도 알겠어.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의문이 하나 생기는 거야.”

“…….”

“범인은, 플레이어만 골라 죽였어. 그런데, 칸나와 아리아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

김태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칸나와 아리아도 플레이어야. 그 말은 즉, 우리처럼 선택한 직업이 있을 거고, 그 힘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시체에는 어떠한 반항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그냥…, 난도질당한 거지 일방적으로.”

“…….”

“그럼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지 않겠어?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서관의 1층 복도, 아리아와 칸나는 아무런 반항 없이 범인을 따라갔을 거고, 그 결과 처참하게 죽게 된 거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뢰가 없는 사람을 아무런 반항 없이 따라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니까.”

“…하, 그래…,”

“범인은 시스템이 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범인은 메인 퀘스트를 이용해 아리아와 칸나에게 접근했고, 그들이 플레이어라는 확신을 갖게 되자 협력하는 척하다 그들을 죽인 것이다-,라는 추측을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가정이 하나 있잖아,”

“범인 또한, 플레이어다.”

그렇지, 내가 말했다. 내 추측들을 들은 김태형이 제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냈다. 70%의 전력이 아니다. 60%, 아니 어쩌면 그 아래.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어디에나 길은 있다. 나는 어제저녁 즈음부터 열심히 끄적여둔 종이를 김태형에게 내밀었다. 상심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있던 그가 내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읽어내리는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체, 이 사진은 뭔데?”

김태형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종이를 팔랑였다. 난도질당한 시체 두 구, 카메라가 없는 이 세계에 그를 대처할 만한 물건을 구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여느 판타지 세계와 비슷해서, 마력을 이용해 만든 마도구라는 것들이 존재했다. 카메라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마도구로 찍어둔 아리아와 칸나의 시체의 모습이 종이에 붙어있었다.

“뭐긴, 필요하니까 찍어 둔 거지.”

“이게 대체 왜 필요한데? 와…, 나 토할 것 같아.”

“됐고, 너, ‘전직’하던 날 기억해?”

“대충은?”

“그럼, 거기 있던 직업들 중 기억나는 게 있어?”

그제야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아, 하는 단말마의 감탄사를 내뱉고는 눈을 홉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태형을 보며 나는 그의 손에 깃펜을 쥐여주었다.

"뭐해? 빨리 적어. 기억나는 거 싹 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

"…이게 진짜 효과가 있어?"

"나도 몰라. 그래도 가만히 손 놓고 구경하는 것보단 낫잖아."

연회장의 책상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여두는 날 보며 김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내 부탁대로 최대한 제 덩치로 내 앞을 가려주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겨? 하는 그의 불퉁한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야 했지만.

벌써 6군데 째였다. 김태형이 보는 눈들을 막아주고, 그 틈새에 내가 책상, 혹은 벽, 혹은 어디든 암호와도 같은 것들을 새겨둔 장소가. 실은 암호라 할 것도 없었지만. 단지, 내 기숙사 호실인 A210을 한글로 적어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알파벳의 첫 글자와 이백하고도 열 개의 파란 조각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너 이거 그 ‘범인’이 보는 순간, 네가 가장 위험해지는 건 알지?”

“몇 번을 말해, 나도 알고 있다니까.”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태연한데?”

“걱정 마, 내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되니까. 그리고, 감히 공녀를 쉽게 죽이려 하겠어?”

“백작 영애도 죽였는데 너라고 못 죽일까.”

“…그런가?”

“아, 율리아, 제발…,”

차라리 제 기숙사 호실을 적으라 말하는 김태형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넌 2인실 쓰잖아. 자기가 빚을 내서라도 1인실을 신청했었어야 한다 한탄하는 김태형을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만 징징거려, 범인은 나 못 죽여. 아니, 죽이더라도 무턱대고 죽이진 않을 거라고.”

“대체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너 같으면 플레이어들이 죽어나가는 이 판국에, 이마에 ‘내가 플레이어입니다.’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드디어 미쳤나?”

“또?”

“…또 무슨 생각을 해야 되는데?”

“바보야, 나라면 ‘속임수인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할 거라고.”

미끼 말이야, 미끼. 내가 말했다. 대놓고 플레이어의 내 기숙사 호실을 적어둔다 해도, 범인은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진짜 ‘플레이어’라는 확신이 필요할 테니까. 무턱대고 나를 죽였는데, 내가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그는 그냥 ‘오르테 공녀’를 죽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칸나와 아리아가 죽임 당한 그 사건에서의 범인의 행보가 굉장히 신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퀘스트가 시작하고 3일 뒤, 아리아가 죽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칸나가 죽었다. 범인은 왜 굳이 3일과 2일이라는 간격을 둬야 했을까?

확신, 그는 이 사람이 ‘플레이어’라는 확신이 들 때만 과감하게 살인을 저질렀다. 아리아와 칸나가 플레이어라는 확신이 들고난 뒤에야 그들을 죽였다는 소리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그는 내가 ‘플레이어’라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나를 죽이지 않는다. 시간이 생긴 셈이다. 물론, 내가 플레이어임을 알게 된다면 공녀고 뭐고 가차 없이 죽일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시간이 생긴 셈이니까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대체, 자기 자신을 미끼로 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있네. 아무튼, 누군가 기숙사로 찾아오면 그 뒤에 그자가 범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돼. 쉽지?”

김태형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머리가 그렇게 팽팽 잘 돌아가냐? 그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글쎄, 실은 아직 이곳이 현실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닐까, 나는 혼자 생각했다. 현실성 없는 곳, 내게는 현실이 아닌 곳에 불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깨달았지만, 여전히 이곳이 내 세계는 아니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글쎄, 추리 소설을 많이 읽어서?”

내가 웃으며 말했다. 속마음을 죄 숨긴 채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내 대답이 싱겁다는 듯 김태형도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낮에 여기저기 내 기숙사 호실을 적어둔 것이 그렇게도 신경 쓰였는지, 꽤 늦은 시간임에도 김태형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진이 선물해 준 카드를 꺼내들었다. 손놀림이 도박꾼 못지않다며 감탄하는 김태형을 무시한 채로 패를 섞었다. 한참 동안이나, 테이블 위의 카드는 치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트리플,”

세 장의 7, 자신만만한 미소가 김태형의 얼굴에 걸렸다.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 패를 흘긋거리자, 그 미소가 더더욱 짙어지는 것이 제 승리를 예감하는 듯싶었다. 방심은 금물이지, 나는 활짝, 이를 드러내 보이며 패를 내려놓았다.

“근데 이번에도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세 장의 퀸이 자리하고 있는 내 패를 보고는 눈썹이 축, 늘어지며 금세 울상이 된 김태형에 나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완승이었다. 암살자인 ‘리퍼’를 직업으로 선택한 주제에 표정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김태형 덕분이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방문에서부터 나는 소리였다. 어느새 김태형의 손에 단검이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허벅지 바깥쪽에 매어 둔 총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귀를 기울였다.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플레이어일까, 나는 김태형에게 눈짓으로 벽에 붙어 있으라 말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하는 내 물음에 문밖의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쿵, 하며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김태형이 신호를 보냈다. 방문을 열었을 때, 바깥쪽에 위치한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한 손에는 리볼버를 든 채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공녀?”

목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으려 애쓴 채 사내를 쳐다보았다. 깊게 눌러쓴 후드, 찔린다면 단숨에 숨이 끊어질 위치에 정확하게 가져다 댄 장검, 그리고, 그의 미간에 정확하게 겨누어진 내 리볼버와 사내의 목을 노리고 있는 김태형의 단검까지. 모든 것이 문을 연지 1초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나는 로브 아래로 언듯 보이는 금색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꿀꺽, 목울대가 일렁였다. 긴장한 탓에 잔뜩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황태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