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도부 전선배
"야야... 그만 마셔! 너 벌써 세 병째야!"
팔을 잡아내리는 동기들의 만류에도 여주의 의지는 뚜렷했다. 막 새로 딴 소주병을 손에 쥐고 제 앞에 있는 맥주잔에 들이붓는다.
콸콸콸...
언뜻 보면 물처럼 보일 소주가 500cc 맥주잔에 가득 찼다. 여주가 그 잔을 한 번에 들이키니 옆에 있던 동기들이 히익 소리를 내며 안절부절하며 테이블에 있는 술을 싹 치웠다. 그래봤자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외치는 여주 탓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야, 고여주! 너 오늘 진짜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여주야, 술만 마시지 말고 말 좀 해 봐. 그... 석진 선배 때문이야?"

"...나 말리지 마...."
유도부에 몇 없는 여학우들. 여주는 무료 안주로 나온 강냉이로 쓰린 속을 달래다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꺼내는 유진의 말에 울컥 눈시울을 붉혔다. 그럼 그제야 여주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치웠던 술을 다시 올려놓지.
"왜. 그 선배가 너한테 막 뭐라고 했어?"
"다미야...."
"어. 말해."

"난 진차... 하... 너무 슬프다... 흐어어엉..."
"취했어? 이유진도 아니고, 말술 고여주가 고작 세 병에 취할 리가 없는데."

"흐엉엉어엉엉...."
다미의 말에 취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뻔한 거짓말일 것을 알아 굳이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혼자 일곱 병을 마셔도 멀쩡한 여주인데, 세 병쯤이야. 톡 쏘는 사이다를 마신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아, 다미야. 지금 여주 슬프다잖아. 위로 좀 해 주고 무슨 일인지 듣자."

"흐어어어엉엉... 듣지 마... 흐어어엉엉ㅇ... 나 말 모대... 흐엉어어어엉..."
"여주야...."
"야, 여기 우리만 있는 줄 알아?? 옆에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우리 과 사람들인 거 잊지 마라."
눈꼬리를 내린 유진은 여주의 손을 붙잡아 같이 슬퍼해 주고, 은근슬쩍 얼굴을 가린 다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 몇 장을 꺼내 여주 쪽으로 던진다.
이 상황에서 극으로 나뉘는 F, T 방식에 여주는 잠시 눈물 섞인 헛웃음을 뱉었다. 석진 선배랑 나랑 MBTI 찰떡궁합이었는데.... 아씨, 다시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렇게 친구들이 걱정스레 무슨 일이 있냐 묻는데도 여주에겐 말 못할 이유가 있었다. 이 술자리가 신입생들과 함께 하는 OT 전 첫 술자리라 주위에 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랬지만...
내게 관심 있는 줄 알았던 선배가 알고 보니 내가 아닌, 동명이인을 좋아했다는 걸 어떻게 말하냐고. 게다가 그 두 사람이 키스하는 것까지 봤다는 얘기는... 흐윽,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한다. 진짜....
"크흥, 돼써... 우리 다른 얘기하자."
"그래. 여주 너 그 얘기 들었어? 나도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기인데, 윤여주랑 석진 선배랑 데이트,"

"다른 얘기하자고."
"...아."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두 사람이 재빨리 주제를 넘겼지만, 이미 늦었다. 여주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꼭 말아쥐고 퐁퐁 떨어지는 눈물을 그냥 두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울고 있던 상태라 이젠 눈물 닦기도 지쳤다.
"어? 전정국? 너 제대 한 거야? 연락하지!"

"놀래켜 주려고 했지. 오랜만이다, 대식아."
눈물을 닦아주는 유진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을까, 옆 테이블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며 갑자기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촉촉해진 눈꺼풀을 들어올려 바라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 맞은편 선배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검은 후드티에 검은 볼캡. 얼굴은 애기애기한데 덩치는 유도부라는 걸 드러내듯 듬직하다. 와, 누가 봐도 유진이 이상형인데. 어쩐지, 아까부터 유진의 손이 눈가가 아닌 입 근처에 가 있더라 싶었다. 아주 정신을 빼고 뚫어져라 옆 테이블을 바라보는 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복학하는 거야?"

"응. 쉬면서 할 것도 없고. 그냥 빨리 졸업이나 하려고."
"여긴 어떻게 알았어."
"과대 형한테 물어봤지. 마침 지나가던 길이라 한 번 들렸고."
"여주한테는 연락했어? 많이 기다리던데."

"...연락을 왜 해. 그런 사이 아닌 거 알잖아."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대화를 비집고 들어왔다. 놀란 눈이 한 테이블로 향하고, 그 시선을 모조리 받게 된 여주는 축축한 얼굴을 쓱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쭈구려 앉아 깨진 맥주잔을 주워 담는 여주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언제, 어디서나, 여주, 여주. 그놈의 여주.
다른 이들이 부르는 여주가 '고여주'가 아닌 '윤여주'인 걸 알면서도 매번 의식하게 됐다. 아이돌 준비를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예쁘고 늘씬한 리듬체조부 윤여주와 못난 건 없지만 잘난 것도 없는 유도부 고여주는 너무나도 차이 났으니까.
"...아."
"여주야, 괜찮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나. 결국 손이 베여버렸다. 옆 테이블에서도 바닥에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본 건지, 그나마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선배 대식이 괜찮냐며 휴지를 뽑아 건넸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 휴지로 피가 흐르는 손이 아닌 바닥에 떨어진 맥주잔 조각들을 쓸어담는다.

"...여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휴지와 조각들을 버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별안간 손목이 잡혀버렸다. 유진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였다. 이름이... 정국이라고 했던가.
"...아, 정국아. 걔는 우리 과 2학년. 너 군대 가 있는 동안 새로 들어온 애라 몰랐겠구나. 이름이 여주야. 고여주."
"...."
"...."
대식의 설명에도 붙잡힌 손목은 여전히 정국의 손 안에 있었다. 여주가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며 눈치를 보는 사이, 정국이 먼저 제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 먼저 간다. 얘 병원 데려다 주고 갈게. 학교에서 보자."
손이 상처투성이인 여주도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