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nghyeon Possession Fanfic] Marriage Blues

Episode 2. The Role of the Husband

웨딩드레스샵 예약 문자를 받은 건 계약서를 쓴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여주는 휴대폰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자신이 잡은 일정이었는데도, 막상 눈앞에 날짜가 뜨니 이상하게 실감이 났다. 드레스 피팅. 예식장 최종 확인. 청첩장 문구 선택. 이름만 보면 진짜 결혼을 앞둔 사람 같았다.

 

 

문제는 진짜 결혼이 아니라는 거였다.

 

 

“오늘 네 시 맞죠?” 성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여주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혼자 가도 돼요.”

답장은 금방 왔다.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굳이 안 와도 돼요. 바쁠 텐데.” “남편이 드레스 피팅에 안 가면 더 이상하죠.”

 

 

여주는 그 문장을 보고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 남편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어색했다. 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 같은데, 여주는 볼 때마다 마음이 한 번씩 걸렸다.

 

 

샵 앞에 도착했을 때, 성현은 이미 와 있었다. 검은 코트에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다. 혼자 서 있는데도 주변 분위기가 묘하게 차분해지는 사람 같았다. “늦었나요?” 여주가 조심스럽게 묻자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일찍 온 겁니다.” “얼마나 일찍 왔는데요?” “조금.” 그 조금이 십 분인지, 삼십 분인지 여주는 굳이 묻지 않았다. 성현은 그런 걸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따뜻한 조명 아래 새하얀 드레스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여주는 그 앞에 서자 갑자기 숨이 조금 막혔다. 예쁜 옷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신부님은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직원의 질문에 여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스타일. 결혼식. 신부. 그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깔끔한 걸로 부탁드립니다.” 성현이 대신 말했다. 여주는 놀라 그를 돌아봤다. “제가요?” “화려한 거 불편해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성현은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여주를 봤다. “예전에 그런 말 했습니다.”

여주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떤 자리였는지. 그런데 성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도 잊은 말을 성현이 기억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첫 번째 드레스는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거울 앞에 선 여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예쁘긴 했지만 어딘가 자신 같지 않았다. 직원은 계속 잘 어울린다고 했지만, 여주는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커튼이 열리고 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여주를 바라봤다.

“별로예요?” 여주가 먼저 물었다. 성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왜 그렇게 봐요?” “낯설어서요.”

“이상하다는 뜻이에요?” “예쁘다는 뜻입니다.”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너무 담담해서 더 이상했다.

칭찬을 들은 것보다, 진심을 들킨 기분에 가까웠다.

 

 

여주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역할에 너무 충실한 거 아니에요?” “역할이면 그렇게 말 안 했을 겁니다.”

성현의 대답에 여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직원이 다음 드레스를 준비하겠다며 커튼을 닫아주고 나서야

여주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불편하게 뛰고 있었다.

 

 

두 번째 드레스는 훨씬 단정했다. 목선이 과하게 드러나지 않고, 허리 라인이 부드럽게 잡힌 디자인이었다.

여주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너무 신부 같지도, 너무 남의 옷 같지도 않았다.

 

 

커튼이 다시 열렸다. 성현은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대신 아주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여주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번 건 괜찮아요?” 성현은 대답이 늦었다. “네.” “진짜요?” “네. 잘 어울립니다.”

 

 

 

 

그 말에 여주는 이상하게 안심했다. 직원이 사진을 찍어보자며 성현을 옆에 세웠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성현은 그런 여주를 눈치챘는지, 팔을 가까이 두면서도 닿지는 않게 거리를 남겼다. “불편하면 말해요.”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여주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말고.”

그 말이 너무 다정해서, 여주는 순간 대답을 잃었다. 성현은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옆에 있으면 불편한 것보다 덜 불안했다.

 

 

촬영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두 사람은 샵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결혼 준비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청첩장 문구, 식전 영상 사진, 예식 음악.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진은 어떻게 할까요?” 여주가 물었다. “필요한 만큼만 쓰죠.” “우리 둘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잖아요.”

“그럼 찍으면 됩니다.” “뭐를요?” “부부처럼 보일 사진.” 여주는 커피잔을 들다 말고 성현을 봤다.

“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네요.” “필요한 일이니까.”

 

 

또 필요. 또 역할. 여주는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성현이 오늘 해준 말과 행동들이 전부 필요한 일이었다면,

자신이 느낀 이상한 설렘도 혼자 착각한 게 되는 것 같았다.

 

 

그때 성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은 카페 밖으로 나가 통화를 받았다. 유리창 너머로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주는 아무 생각 없이 청첩장 샘플을 넘기다가, 유리문이 살짝 열리며 성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 계약 끝나면 정리할 겁니다.”

 

 

손끝이 멈췄다. 알고 있던 말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조건이었다. 1년 뒤에는 별다른 이의 없이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인지 그 말을 성현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마음 한쪽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성현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청첩장을 보고 있었다.

 

 

“문구 골랐어요?” “아직이요.”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냥 무난한 걸로 해요.”

성현은 여주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래요?” “뭐가요?” “아까보다 표정이 안 좋아졌습니다.”

 

 

여주는 웃는 척했다. “피곤해서요. 드레스 입어보는 게 생각보다 힘드네요.”

성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있던 따뜻한 물컵을 여주 쪽으로 밀어줬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괜찮아요. 해야 할 거 많잖아요.” “많아도 오늘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주는 물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감쌌다. 따뜻했다. 그런데 그 온기가 이상하게 서러웠다. 정리할 거면서 왜 자꾸

이런 걸 챙겨주는지. 필요해서라면, 역할이라면, 차라리 끝까지 차갑게 굴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신도

헷갈리지 않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여주는 거의 말이 없었다. 성현은 몇 번이나 여주를 힐끗 봤지만, 먼저 묻지는 않았다.

차가 집 앞에 멈췄을 때, 여주는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다음 일정은 제가 혼자 가도 돼요.”

성현의 손이 핸들 위에서 멈췄다. “왜요?” “성현 씨 바쁘잖아요.”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여주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다.

 

 

“어차피 밖에서만 부부처럼 보이면 되는 거잖아요. 준비 과정까지 전부 같이할 필요는 없어요.”

성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차 안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게 편해요?” 그가 물었다.

여주는 창밖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거짓말이었다.

 

 

성현과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문제였다. 같이 있으면 자꾸 기대하게 됐다.

계약서 밖의 마음까지 욕심내게 됐다. 그건 위험했다.

 

 

여주는 차에서 내리기 전 작게 인사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주가 문을 닫고 몇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 씨.”

여주는 멈춰 섰다. 성현은 차에서 내려 있었다. 밤공기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남편 역할을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여주는 천천히 돌아봤다. “그럼요?”

성현은 대답 대신 잠시 여주를 바라봤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사람처럼.

결국 그는 낮게 말했다. “오늘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여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현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더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차 문을 열기 전,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다음 일정도 같이 갈 겁니다. 싫으면 그때 말해요.”

 

 

차가 떠난 뒤에도 여주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리할 거라던 사람. 그런데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던 사람.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어서, 여주는 더 무서워졌다.

결혼식까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마음은 벌써 계약서 바깥으로 한참이나 벗어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