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EL JUEGO [Serie descontinu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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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GAME

NO. 04

W. 설하

메를린 아카데미, 크레아 제국 내 유일한 아카데미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명망 있는 인재들을 여럿 배출해냈다는 점에서부터 그 이름이 가지는 명성에 대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입학시험에 통과하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하더라도 그를 실현시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만일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메를린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쉽게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재학 중에도 자신의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가차 없이 학생을 내쫓기로도 유명한 아카데미는 그 학생이 제국의 황태자라 하더라도 그 편의를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우선, 나는 이 퀘스트가 이르는 '이상 현상'에 대해 알아내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카데미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으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라던가, 성적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죄다 뒷전인 셈이었는데,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할 방법을 고안해내고, 입학시험을 백날 준비해 봤자-,

"그게 무슨 소리니, 절대 안 된다!"

"울리아, 넌 몸도 성치 않은 애가…! 갑자기 아카데미에 가야 할 이유가 없잖니, 게다가 아카데미는 힘들기로도 유명하잖니…."

"그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율리아? 나도 네가 걱정되긴 마찬가지니까."

공작가의 '사랑받는 막내딸'인 율리아 비안 오르테가 된 나에게는,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 원서를 넣는 것만을 목표로 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난관은 단연 가족들의 반대라 할 수 있었으니, 오르테 공작과 공작부인은 고사하고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진 마저도 반대를 외치는 와중에 이들을 설득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이들이 내가 아카데미로 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인 '건강'을 해결하자니, 어디 볕 좋은 남쪽으로 1년쯤 요양하다 왔을 때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일이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떼를 써봤자 어쩐지 역효과만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 어떡한다. 오늘도 그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며 서재에서 아카데미 관련 서적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어?"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면, 쪼그려앉아있는 내 앞에 덩달아 쪼그려앉아 나를 마주 보는 알엠이 보였다. 내가 읽고 있는 서적들이 죄다 아카데미와 관련된 서적이란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그가 내게 물었다. 응, 하며 나는 대답했다.

"예전에는 아카데미에 관심도 없더니, 전에 형이 원서라도 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는 단번에 거절했잖아."

"…내가 그랬어?"

"응, 그것도 아주 매몰차게 말이지."

알엠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진짜 '율리아'라면 모를까, 내게는 없는 기억이었기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거야?"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답답했어. 아카데미에 가면 조금 더 많은 걸 경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네가 원한다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막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단순히 경험을 원하는 거라면, 아카데미 말고도 할 수 있는 선택이 수십 가지가 넘는걸."

"…그렇지만, 아카데미만큼 끌리는 게 없기도 하고, 예전의 나에게는 불필요하다고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아카데미가 꽤 유용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

"…그냥, 원서라도 넣어보고 싶었어."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가 말했다. 잘 둘러댄 걸까? 살짝 횡설수설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곁눈질로 알엠의 반응을 살폈다. 한 명이라도 설득해놓아야, 아카데미에 쉽게 갈 수 있다. 속으로 아카데미와 관련된 변명들을 몇 가지 생각해놓으며 나는 연신 손을 꼼지락거렸다. 알엠은 그런 내 반응을 살펴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꼼지락거리던 내 손을 제 큰 손에 넣고는 나도 일으켜 세운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재를 나와, 저택의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한 층 올라가는 내내 나는 그에게 어디 가냐는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원서 접수까지야. 합격은 네 몫이고."

입술 새로 튀어나오려는 환호성을 참기 위해 얼마나 애써야 했는지, 오르테 공작의 집무실 앞에서 경고하는 알엠을 향해 나는 말갛게 웃어 보였다. 응, 그럴게! 하는 내 대답에 알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웃었다. 이내, 집무실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린 알엠과 나는 공작의 들어오라는 허락과 동시에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단지 알엠 한 명이 내 편을 들어주었을 뿐인데, 오르테 공작은 내 아카데미 행을 그렇게 반대하는가 싶더니, 알엠의 말을 듣고는 꽤나 고심하는 눈치였다. 알엠이 나를 대신해 내건 조건은 이러했다. 내가 아카데미 입학 원서를 접수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표출하지 말 것, 대신 입학시험은 나 혼자의 힘으로 치러야 하며, 입학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카데미에 가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통과한다면 가족들은 반대 없이 나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 이마저도 너무 위험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심하는 듯한 오르테 공작이었으나, 너무 위험한 학부에 지원하지 않을 거라는 내 말과, 아카데미엔 진이 재학 중이고, 정 불안하다면 자신도 북부에 함께 올라가겠다는 알엠의 말에 그나마 안심한 듯싶었다.

"좋다, 원서는 접수하도록 하자꾸나, 율리아."

그렇게 나는 비교적 순탄하게 아카데미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입학시험이라는 아주 거대한 벽이 남아있긴 했으나 네 사람을 설득하는데 쓸 시간을 입학시험에 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퍽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오르테 가의 서재에는 찬 공기만이 가득했다. [크레아 제국과 아카데미의 상관관계] 따위의 책을 잔뜩 쌓아놓은 채, 나는 서재의 한구석에서 처박히다시피 앉아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내가 살던 곳과는 달리 이곳은 인터넷과 같은 것들이 발달하지 않은 세계라, 정보를 얻을 수 있을법한 매개체라고는 책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장에 쌓여있던 먼지들이 흩날렸다. 나는 내 얼굴 근처를 맴도는 먼지를 손을 휘저어 날려보내고는, 다시금 글자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입학시험이 코앞이었다.

IN GAME

"율리아, 얘야, 제발 몸조심하렴…."

"그럼요, 늘 조심할게요."

"연락 자주 하고, 몸이 성치 않다 싶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거라, 얘야."

"그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진이 같이 가주니 한결 안심이 되는구나."

하필이면 북부로 출발하기 며칠 전, 찬바람을 쐬며 서재에 틀어박힌 탓에 감기에 걸렸던지라 가족들의 걱정이 더욱 깊었다. 그들은 몸도 성치 않은 나를 아카데미의 입학시험 때문에 머나먼 북부로 보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마차에 진과 나의 짐을 다 실은 뒤에도 쉽사리 우리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빨리 가야 한다 짜증을 부리는 대신, 오르테 공작부인을 꼬옥 안아주는 편을 택했다. 어깨 부근이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오르테 공작부인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진의 에스코트를 어색하게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딱딱한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 몇 겹이나 쌓여있는 방석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푹신한 의자에 걸터앉아, 자그마하게 난 마차의 창문을 통해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몸조심하렴, 몇 번이고 내게 했던 당부를 또다시 입에 담는 오르테 공작부인에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진이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고는 문을 닫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바퀴가 느리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출발하는 마차를 보고 기어이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오르테 공작부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나는 공작가를 떠났다.

"오랜만에 나오니 기분이 어때?"

"음, 조금 낯설어. 그래도 기분 좋아."

"아, 공작가 밖으로 나가는 게…, 처음이라 느껴지겠구나."

"그렇지, 예전 일은 기억이 없으니까."

사실 진짜로 처음이지만. 뒷말을 삼켜내고는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되도록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에 차가운 금속이 닿아 약간씩 소름이 돋아나기도 했다. 짐가방에 몰래 넣으려 했는데, 멀리 떠나는 딸을 위해 직접 짐을 챙겨주는 오르테 공작부인에 의해 그러지도 못했다.

"아니, 아가씨…! 대체 해적들이나 쓰는 총집을 어디다 쓰시려구요…!"

"미아, 제발…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줄 거지?"

"저야 아가씨께서 입을 다물라 하시면 다물겠지만은요…. 대체 뭐 하러 이런 걸…."

미안해 미아, 그렇다고 눈앞에 총을 들이밀며 이런 걸 들고 다닐 일이 생겼다고는 할 수 없잖니. 리볼버를 누군가에게 들켰다가는 겨우 허락받은 북부행이 취소될까 택한 방법이었다. 유난히 나를 잘 챙겨주던 시녀 아이, 미아가 총집을 보며 경악하던 것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율리아'가 분명 너를 아꼈기에 기억을 잃은 내게도 그리 거리낌 없는 호의를 내보일 수 있었던 것이겠지.

마차의 창문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따라 달리는 마차가 덜컹이며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창밖의 낯선 풍경들을 눈에 담다 몸이 꽤 노곤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감았다. 고요한 공간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눈을 감자마자 내 얼굴 위로 닿아오는 진의 시선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사회학부에 지원했다고 했지?"

아, 그의 물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오롯이 내게 닿아오는 그 시선을 피하며 나는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행동과는 다르게 '응'하는 긍정의 대답이 나오지 않는 내 머릿속은 끝도 없는 고민 중에 있었다. 어떡하지,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이 모든 고민은 내가 신청한 학부가 사회학부가 아니라는 사실에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다양한 학부를 설립해, 재능과 역량이 뛰어난 학생들이 본인의 재능에 맞춰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학부 중에서도, 유독 '위험하다'라고 느껴질 법한 수업을 진행하는 학부 또한 존재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르테 공작 또한 아카데미 입학 원서를 제출하는 것에 있어서 그런 학부를 피할 것을 조건으로 건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그들에게 진과 같은 학부인 사회학부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며 그들을 안심시킨 바 있었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당장의 거짓말로 진의 눈을 가린 채 이 순간을 빠져나갈 것인지, 솔직한 대답을 진에게 들려줄 것인지를. 전자를 택하자니, 어차피 북부에 도착해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는 날 죄다 알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후자를 택하자니 당장 마차를 돌려 오르테 공작가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전자를 택한 이유는, 진에게 어떤 이유에서든 또 다른 거짓말을 내뱉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느 날 밤 날 찾아왔던 그의 다정한 손길 때문인지, 내가 진짜 율리아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알량한 죄책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아? 하고 다시금 나를 불러오는 진의 음성에,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미안, 내가 거짓말했어."

"…사회학부가 아니구나?"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내 모습을 보며 진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싶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에서도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럴 것 같았어, 하는 진의 말에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려야만 했다. 안전이라던가 하는 복합적인 이유로 그 또한 내가 사회학부로 지원할 것을 바랬기 때문에 더욱이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진의 시선이 짙어졌다. 나는 차마 수그렸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디로 지원했니."

아,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율리아, 하며 채근하는 그의 딱딱한 말투에도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은, 내 대답을 들은 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다른 무난한 학부에 지원했다면 내가 그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것을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

"…군사학부."

"…뭐?"

"군사학부, 군사학부에 지원했어."

리아! 하는 벼락같은 노성이 마차 안에 내려앉았다. 읽던 책을 소리 나게 덮은 진의 시선이 내게 똑바로 박혔다. 그 눈빛에 서린 노기가 서늘하리만치 선명했다. 대체…, 하며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메를린 아카데미의 군사학부, 악명이 자자한 그 학부는 아카데미의 교육을 이수하다 죽는 학생들이 가장 많은 학부이기도 했다.

"왜, 대체 네가 왜…."

"……."

"네가, 너와는 아무런 관련도, 단 한 줄의 연고도 없는 군사학부에 들어가서, 그 많은 훈련들과 전투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뭐길래,"

"……."

"대체! 멀쩡한 남성들도 몇 개월을 버티는 이가 없는 그런 학부에, 죽어나가는 이가 한둘이 아닌 그런 학부에 네가 뭐 하러!"

"…걱정하는 거 알지만, 그래도 내가 원해서…!"

"아니, 걱정하는 걸 안다면 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

"그게 네 선택이라면, 내가, 그리고 부모님이, 알엠이, 저택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

"단순히 네가 원한다는 이유로, 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네가 무시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게."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낯으로 진은 말했다. 이유?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나라고 좋아서 이런 연고도 없는 세계에 뚝 떨어져 아카데미에 입학하려 아등바등 노력한 게 아니었다. 걱정? 누가 해달라고 했나, 제국의 안녕? 제국의 발전? 그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깟 퀘스트가 뭐라고, 내 사람도 아닌 율리아의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뭐라고, 그 모든 게 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비뚤어진 생각임이 분명했다. 갑작스레 치민 불안정한 감정들에 휩쓸린 못난 생각들임이 분명했다.

군사학부는 내게 최선의 선택지였다. 이 세계에 대해 일말의 지식도 없는 내가 다른 학부에 들어가서 뭐 하겠는가, 역사학부, 사회학부, 경제학부, 내가 이 세계에 뿌리내린 채 '율리아'로 살아갈 것도 아닌데, 그깟 것들을 배워 어디다 써먹겠느냔 말이다. 내게 이 세계는 언젠가 떠날 세계일 뿐이었다. 율리아가 아끼던 모든 것들이 이 세계에 있다 해서, 내가 한순간에 '율리아'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율리아는 이 세계를 사랑했을지언정 나는 아니었다. 난 이 세계를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았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모든 것들은 죄다 다른 세게에 있는데, 그걸 되찾기 위해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기에 선택했다. 다른 학부들이 아닌 군사학부로 가는 것을. 누군가가 걱정할 것을 뻔히 알아도, 그들이 반대하는 것이 빤히 보여도, 나는 내 선택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내가 무슨 이유를 대던, 오라버니가 납득할 수는 없을 거야."

"너 그게 무슨…,"

"거창하지도, 설득력 있지도 않지만 그저 내가 원했기에 그랬다는 게 내 이유의 전부야,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납득할 수 없어도, 부모님이 반대하셔도,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반발하고 나서도 그래도, 그래도 그건 내 선택이야."

"……."

"걱정한다는 이유로 내 선택을 구속하지 마. 내 선택지를 좁히지 마."

"……."

"난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야, 오라버니."

율리아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진정 이런 삶을 사랑했냐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네 선택이 강요되는 이런 상황이, 정말로 네가 원하던 것이 맞느냐고. 나는 그녀의 삶, 그녀의 생각,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막연하게 바랄 뿐이었다. 언젠가, 정말로 만약에, 내가 '내' 삶으로 돌아가고, 이 몸에 원래의 '율리아'가 돌아오게 된다면, 지금 내 선택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달라고. '내'가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렇게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주하던 올곧은 시선이 이리저리로 흐트러진다. 슬픈 표정, 무언의 감정들이 무수하게 담긴 진의 눈동자가 서서히 감긴다.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던 진의 입에서,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야, 리아…. 하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을 터였다. 그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치맛자락 밑으로 만져지는 딱딱한 리볼버의 감촉이 그렇게 불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결국 진은, 마차를 돌리지 않았다.

/

제국 북부의 거리는 떠들썩했다. 반년마다 돌아오는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라는 거대한 행사를 코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차 가까이로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구경하던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의 날씨만큼이나 마차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던 탓이었다. 북부로 오는 그 머나먼 길이 어찌나 불편하던지, 그 길고 긴 시간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진은 덮은 책을 다시 펼쳤고, 나는 그에게 말을 붙여보려 달싹이던 입술을 꾹 닫았다. 숨 막히는 고요함만이 우리 사이에 자리했다. 진의 책장은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바로 앞에 위치한 메를린 거리의 한복판에서 마차는 나와 진을 내려주었다. 장시간의 이동은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기에, 우리는 지체할 것 없이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머물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손에 짐을 든 채로, 진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 걸었다. 처음 거닐어보는 이 낯선 거리에, 이 낯선 세상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지만, 아직까지도 내게 화가 나 있음을 표하듯 자꾸만 빠르게 멀어지는 진을 쫓아가기 위해서라도 나는 화려한 거리의 풍경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내야 했다.

"…짐 이리 줘."

"아니야, 내가 들게."

"내가 들게, 리아."

"…알았어."

진의 커다란 손이 내 짐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그 표정을 잠시간 바라보다, 나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 그를 쫓았다. 텅 비어버린 왼손이 허전했다.

우리가 머무를 여관은, 평소 귀족들이 많이 사용하곤 하는 고급 여관이라 했다. 내가 있던 세계로 따지자면 5성급 호텔 정도 되는, 그런 고급 여관. 마부가 내려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여관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나와 진을 맞이했다. 짐을 옮겨주겠다는 사용인의 말에 진은 거절하지 않고 나와 그의 짐을 사용인에게 맡겼다. 익숙하게 겉옷을 벗어 사용인에게 건네는 진을 보며 나도 그를 따라 겉옷을 벗었다. 그 뒤, 호텔의 관리인에게 직접 안내받은 방은 호화롭고 아늑했다.

"푹 쉬어, 리아."

"응."

"…혹시 나가고 싶으면, 편하게 말해."

함께 나가주겠다는 뜻일까, 혹은 혼자 나가더라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일까. 진의 성격상 당연히 전자를 뜻하는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이 후자이길 내심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제가 머물 방으로 들어가는 진의 뒷모습이 왠지 지쳐 보였다.

넓은 창으로 따뜻한 햇볕이 들어왔다. 북부의 바람은 살을 벨 듯 차갑고 날카로웠으나, 그 햇빛만은 그렇지 않았다. 메를린 거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언제나 활기를 띤 행인들이 잔뜩 걸어 다니는 거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방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창 바로 아래에 놓았다. 언젠가부터 생긴 취미이자 습관이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창 너머로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눈에 담는 것. 신문을 여러 개 들고 길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어린 소년부터,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스레 눈이 쌓인 길 위로 걸음을 내딛는 늙은 노인까지. 별다를 것 없었다. 이 세계나, 내가 살던 원래의 세게나. 어딜 가나 사람은 넘쳐나고, 그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모습으로 저들의 삶을 살아간다.

"…음,"

그리고 어딜 가나, 수상쩍은 사람이 수많은 사람 사이에 꼭 한 명쯤은 섞여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새카만 후드를 뒤집어쓴, 새카만 복장의, 새카만 신발을 신은 수상한 사내. 심지어는 손에 들고 있는 주머니조차 새카만 색이었다. 호기심 어린 내 시선이 그를 쫓았다. 겨우 3층 남짓한 건물들이 주르륵 모여있는 거리는, 온통 까만 복장을 한 남자가 숨기에는 적절하기 그지없는 골목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사내는 내가 머무는 여관의 반대쪽에 위치한 건물들 사이의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후드의 끝자락이 골목의 그늘에 채 가려지지 못했다. 

[돌발 미션 : 추격전]

당신은 우연찮게

메를린 거리 한복판에 숨어든

'수상한 사내'를 발견했습니다.

누군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메를린 거리의 골목으로 숨어든

정체불명의 사내,

사내가 가지고 있는 '수상한 주머니'에는

무언가 희귀한 것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수상한 사내를 추격하여 그를 제압하고,

'수상한 주머니'를 획득하십시오.

성공 보상 : 수상한 주머니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 선택 시,

퀘스트는 자동으로 취소됩니다.

수락 / 거절

아, 이런 거였나. 눈앞에 띄워진 새파란 창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찮게'라니, 이 퀘스트가 부여된 것만으로도 저 사내가 이 거리에 나타난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었다. 퀘스트 창을 띄워두고, 시선은 수상한 사내를 쫓으며 나는 고민했다. 뒤를 쫓을 것인가, 말 것인가. 굳이 수상한 주머니를 강조하는 걸로 보아, 그 안에 든 물건이 희귀한 편에 속할 것 같긴 했다. 좀 솔깃하긴 한데…. 나는 아직까지 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삐죽 튀어나온 망토가 우스웠다. 적어도 저 사내가 어딘가에 숨는 데 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 것 같았다.

어떡할까, 창틀을 툭툭 건드리며 나는 고민했다. 시선은 여전히 사내의 근처에 머무르는 채였다. 아, 귀찮은데 그냥 쉴까. 보상에 혹하긴 했지만 귀찮음과 피곤함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구경이나 하자, 싶어 의자에 걸터앉은 내 시야에 들어온 또 다른 사내의 행동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그날 여관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수상한 사내가 숨어든 골목 근처, 키가 훌쩍 큰 다른 청년 하나가 못 박힌 듯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전부였으면 내가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겠으나, 이어진 그의 행동에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청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배회하는 시선, 거기에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 허공을 잠시간 툭 건드리는 곧은 손가락. 그 행동은 내가 늘 하던 것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 청년을 지켜보며 미아가 챙겨주었던 검은색 망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렸다.

청년의 시선이 사내가 숨어든 골목으로 향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방을 나섰다.

"…혹시 나가고 싶으면, 편하게 말해."

진의 말은 분명히 '함께 나가줄 것이다'라는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 분명해서, 나는 그가 있을 방 문을 잠깐 바라보다 숙소를 나섰다. 마차를 잡아드릴까요? 하는 여관 관리인의 정중한 물음에 됐다고 답한 뒤, 나는 뛰다시피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망토에 달려있던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수락',

'퀘스트 진행이 시작됩니다!' 하는 알림과 함께 새파란 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청년이 서 있던 자리를 확인한 나는, '수상한 사내'가 숨어들었던 골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상한 주머니 따위의 보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진의 말을 무시하고 여관을 나온 건 그깟 퀘스트 때문이 아니었다. 호기심, 그래,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수상한 사내'를 쫓는 또 다른 청년 하나, 그가 보인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플레이어'

그는, 또 다른 플레이어임이 분명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