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 GAME
NO. 11
W. 설하
황태자가 내 방으로 찾아오기 하루 전, 그러니까 칸나 이프게니가 살해당했던 날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러니까,
"뭐해? 빨리 적어. 기억나는 거 싹 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이 날 저녁으로 말이다. 나는 칸나와 아리아를 죽인 플레이어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체를 통해 칸나와 아리아를 죽인 플레이어를 찾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시체들의 상태를 고스란히 담은 사진이 필요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니까, 직업을 통해 범인을 추려내겠다, 이거잖아."
"그렇지 뭐,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게 되겠네."
"…그게 가능해?"
불신 어린 김태형의 물음에 나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닦달할 뿐이었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너는 머리를 쥐어뜯어서라도 기억해 내. 투덜거리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김태형을 보며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김태형은 칸나와 아리아를 죽인 범인이 아니다. 그가 들었다면 퍽 섭섭해할 말이겠지만, 나는 아리아의 시체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를 범인에서 완전히 배제해두지 않았다. 내 눈을 피해 그런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친하다 한들, 그가 내 뒤통수를 때리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웃는 낯 아래 어떤 얼굴을 감추어 두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협력이랄 것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서인지, [서브 퀘스트 : 조력자]조차도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김태형을 맹신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그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범인이 아니다. 내가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칸나가 죽은 뒤, 그녀의 시체를 확인했을 때 즈음.
"자, 내 기억력은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봐…."
"…꽤 많이 썼는데?"
"다행이네. 그럼 이제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흠…,"
"너는 머리가 너무 팽팽, 잘 돌아가서 따라가기 힘들다고,"
김태형이 내 의도를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 거라는 내 생각은 반쯤 틀린 생각이었나 보다. 나는 그가 적어둔 직업의 목록을 천천히 살피며 말했다.
"내가 직업을 적으라 한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
"그래, 어느 정도는."
"나는 이 직업들과 시신의 상태를 비교해가면서, 누가 칸나와 아리아를 죽였는지 알아낼 거야. 그래서 시신의 상태가 잘 드러나있는 사진이 필요했던 거고."
대체 시체 사진이 왜…? 김태형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작게 웃었다. 나는 시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진 종이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아주 깊게 베여서 뼈까지 갈라질 정도의 자상, 외에 다른 외상은 없음. 온몸이 난도질당해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 높음."
"……."
"그럼 이제, 어떤 직업이 저렇게 깊은 자상을 낼 수 있는지만 알아보면 돼."
IN GAME
다시 현재로 돌아와보자. 내 목에 칼이 겨눠지고, 황태자의 미간에는 내 리볼버의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으며, 심지어 그의 목에는 김태형의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는, 그런 상황으로.
황태자, 카일로스 체슬라 폰 크레아. 주변 사람을 과하게 경계하고 관찰하는 모습을 보임.
A210, 알파벳의 첫 글자와 이백 하고도 열 개의 파란 조각들, 황태자는 과연 내가 남긴 힌트를 보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손에 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내 목을 겨눈 기다란 검은 치우지 않은 채로.
"…그대가 왜 여기 있지? 루미안 후작 영식은 또 왜 이곳에 있는 것이고,"
"제 기숙사에 찾아오셔서 다짜고짜 제 목에 칼을 들이밀어놓으시고는 그리 물으신다면, 제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 내가 이곳을 찾았다지만, 이곳이 공녀의 기숙사라는 사실은…, 음, 나한테도 좀 많이, 당황스러운 사실이라서 말이야."
플레이어일까, 아닐까. 황태자는 신중했다. 저가 이곳을 굳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으면서, 플레이어라던가 시스템이라던가, 누군가가 '플레이어'임을 알게 할 수 있게 하는 단어들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질 않았다. 제 목적에 대해 숨기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알아채 주었으면 하는 사람처럼.
"대한민국,"
"……."
"전하께서 이곳을 찾으신 이유가, 이 단어와 관련이 있나요?"
하지만 그가 플레이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던 나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밤늦은 야심한 시각에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누군가의 기숙사에, 심지어는 여성의 방을 찾아올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제국의 황태자는 그 흔한 추문 하나 붙지 않은 이였다. 나쁜 소문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기도 해서, 그가 부러 얼굴을 꽁꽁 숨긴 채, 이렇게 몰래 나를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태형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쪽의 패를 먼저 까면 어떡하냐는 듯한 그 눈빛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 건조한 입술을 혀로 핥는 그 자그마한 움직임, 땀이 잔뜩 밴 듯 검의 손잡이를 다시 한번 고쳐 쥐는 손길. 나는 확신했다. 그가 곧 내 목을 겨누던 검을 내릴 것이라고.
"…황태자, 카일로스 크레아라고 한다."
"……."
"불과 얼마 전까지는, 전정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말이야."
목에 닿던 서늘한 칼날이 내려갔다. 황태자가 제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금색 머리카락, 빛 아래에서 보니 백금발에 더 가까운 결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그 이마 언저리를 맴돌았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의 미간 정 중앙을 겨누던 리볼버를 내렸다. 김태형도 마지못해 황태자의 목을 겨누었던 단검을 치웠다.
"율리아 비안 오르테라고 합니다."
"…원래 이름이 그 이름인가?"
"사정이 있어서 원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어서요. 제 정체에 대해 의심하고 계시는 거라면, 루미안 후작 영식께서 입증하실 수 있겠지요."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불만이 많아 보이는듯한 김태형이 뚱한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던 전정국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으로 보아, 김태형이 손에 힘을 꽤 많이 준 듯했다. 이내 후드를 완전히 벗어던진 전정국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착석했다. 책상 위에 엉망으로 흩어진 카드들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리아 비엔타, 칸나 이프게니,"
"……."
"내가 너희들을 찾아온 이유기도 해. 하나 물을게, 너희들이 죽였나?"
"…그럴 리가요,"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대답했다. 면전에 대고 네가 범인이냐-, 물으면 누가 맞다고 하겠나, 다 아니라고 하지. 황태자의 행동에서 이따금씩 나타나는 나와 김태형에 대한 신뢰에 나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만약 나나 김태형 둘 중 하나가 범인이고, 황태자를 작정하고 속인 것이라면 그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럴 위험이 전혀 없다지만.
"알리바이 따위를 원하시면 얼마든지 증명해드리죠."
"아냐, 그럴 것 같았어. 너희들이 범인이라면, 이번 사건들에 대해 이렇게 열심히 조사하고 다니진 않았겠지. 되려 꽁꽁 숨었다면 몰라,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데 어떻게 범인이라 생각하겠어?"
전정국이 소파 근처의 협탁에 올려두었던 종이뭉치들을 건드리며 말했다. 그간 김태형과 내가 발품을 팔아가며 모은 정보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종이였다. 그 짧은 새 저기 적힌 내용들을 대충 훑어보기라도 한 건가? 그제야 전정국이 우리에게 보이는 신뢰에 대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허나 그가 우리를 믿건 말건, 우리가 황태자를 믿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우리에겐 황태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었다. 그가 우리에게 신뢰를 보이다 뒤통수를 때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전정국이 앉은 소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리볼버를 꽉 쥔 채였다.
"전하께서는 전하가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전정국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없다, 전혀."
"……."
"그 시간에 어디서 뭘 했는지 정도는 증명해 보일 수 있겠지만, 너희들이 원하는 증거라는 건 그런 불확실하고 불필요한 게 아닐 테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너희들은 그런 불확실한 증거들 말고, 확실하게 누군가가 범인이다, 아니다를 판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설마,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기저기 그대의 기숙사 호실을 남겨두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플레이어가 두 명이나 살해당한 지금에서야 그런다는 건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협조하실 겁니까?"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아직 단검을 쥔 채로 손장난을 하는 제 손에 시선을 처박아두었음에도, 마치 전정국을 시험하듯, 그를 샅샅이 훑는 김태형의 시선이 느껴졌다.
"협조하실 거라면 방법을 알려드리죠. 그렇게 못하시겠다면, 저희의 협조도 약속드리지 못합니다."
"나를 범인으로 몰고 가겠다는 뜻인가?"
"증거도 없는데 그럴 수야 있나요,"
말릴 새도 없이 김태형이 전정국을 향해 암기를 날렸다. 단검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는 그대로 벽에 박혔다. 전정국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날이 바짝 선 단검에 스친 그의 귓불에서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새어 나왔다.
"그저, 협조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김태형이 웃으며 말했다. 말이 좋아 웃는 낯이지, 그 번뜩이는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나는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멀거니, 김태형을 바라보던 전정국의 입꼬리가 예쁘게 치솟는 것을 보았기에.
"협조하지, 협조하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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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 : 카일로스 체슬라 폰 크레아 / 전정국]
직업 : 나이트(KNIGHT)
칭호 : 검색 결과 없음.
레벨 : 12
스탯 : 체력 (LV. 7)
운 (LV. 5)
민첩 (LV. 6)
지능 (LV. 6)
힘 (LV. 8)
패시브 스킬 : 로열 가드 (LV. 5)
소드 부스터 (LV. 4)
소드 마스터리 (LV. 5)
진행 중 : [메인 퀘스트 : 협력]
완료 :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 외 2
"이제 나에 대한 의심은 좀 풀렸나?"
황태자, 전정국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내 목에 난 상처에 [만능 연고]를 발라주는 김태형의 부루퉁한 표정을 보다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요,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또 그만큼 확답을 피하기 쉬운 대답도 없었다.
"그럼 이제, 내 상태창을 보는 게 어째서 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증거가 되는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아리아와 칸나의 사인(死因)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으니까요. 전하께서 쓰시는 그런 얇은 검으로 온몸에 자상을 입히기는 쉽지 않죠. 대검이면 모를까."
"그러니까, 시체의 상태와 내 직업을 통해 내가 범인인지 아닌지를 유추했다?"
"그런 셈이죠."
전정국이 내 목에 칼을 들이밀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으나, 너무 김빠진 사이다처럼 시시한 결말이 아닌가 싶었다. 장검으로는 뼈가 파일 정도의 자상을 내기 어렵다. 물론 전정국이 스킬을 사용했다거나 하면 아주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의 스킬창까지 죄다 확인한 지금, 그가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한 셈이었다. 그러니 용의선상에서는 제외,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를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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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시간 : 6D 1H 17M
남은 플레이어 : 6
진행률 : 28%
제외된 플레이어 : 1
사망한 플레이어 : 2
그러니 협력은 하겠지만, 완전한 신뢰는 아니었다. 아직 증명되지 못한 수많은 가설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퀘스트 창의 진행률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칸나와 아리아가 죽은 탓에 100%는 글러먹었는데, 그래도 전정국과 협력관계를 맺었다고 28%로 오른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남은 플레이어에서 칸나와 아리아는 제외해 주지도 않는 주제에.
혹시 원래 직업이 추리소설가였냐는 실없는 소리를 하는 전정국과, 여전히 내 목에 난 상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김태형에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김태형과는 달리 전정국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은 게 확실한가? 혹시 그 범인이 오기라도 하면…, 그대가 남긴 흔적을 봤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럼 밤새 같이 있어주시려고요? 추문이 생기기 딱 좋겠네요, 전하. 걱정 마세요. 저희의 대화를 듣지 않는 이상 제가 플레이어라는 사실도 모를 테니까요."
"훔쳐듣고 있었다면 어쩌려고,"
"그것도 걱정 마시지요. 평범해 보여도 보안 마법이 이중, 삼중으로 쳐져 있는 방이니까요."
"…기숙사에 그런 고위 마법을 설치했다고?"
"아시다시피 오르테 공작가는 '그런 고위 마법'을 직계의 안전을 위해 사용할 정도는 되는 가문이라서요."
오라버니께서 이 정도는 해두는 게 좋다고 하시길래, 하며 빙긋 웃으니 전정국이 허, 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법, 이 세계가 현대와는 달리 마력을 운용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아주 미약한 힘에 불과했다. 백 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선천적인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죄다 미미한 마력뿐. 영화에서나 보던 거대하고 강력한 마법 자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기가 찰 수밖에. 저택도 아니고 고작 기숙사 하나에 고위 마법인 방어 마법을 거는 가문이 몇 개나 되겠는가? 돈이 썩어나게 많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오르테 공작가는, 돈이 썩어나게 많았다. 소파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전정국이 이미 문가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김태형에게로 다가섰다.
"아, 그리고 다음에 보면 말을 놓도록 해, 어색하잖아."
"그래, 그럴게. 그러니까 이만 나가주겠어?"
"……."
크흡, 하며 입술을 꽉 깨물고는 웃음을 참는 김태형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명백한 축객령에 두 사람은 더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서야 했다. 내일 봐, 하는 인사를 남긴 채, 비로소 고요해졌다.
김태형이 내 방에서 늦게까지 죽치고 남아있는 바람에, 여태 갈아입지 못했던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혼자서 목욕을 마친 후, 얇은 슬립까지 꺼내 입은 나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이불이 몸을 감쌌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 물이 한가득이라, 뽀송뽀송했던 침대의 이불이 축축하니 젖어들었다. 혼자 하는 것이 익숙했던 적이 있었냐는 듯, 공작저에서 미아의 시중에 익숙해진 몸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귀찮다, 그냥 자자.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노곤노곤한 기분을 만끽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탈 많은 하루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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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를 완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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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시간 : 6D 1H 17M
남은 플레이어 : 6
진행률 : 28%
제외된 플레이어 : 1
사망한 플레이어 : 3
"어떻게 생각해?"
김태형의 물음에 나는 샐러드를 대충 휘적거리며 대답했다. 몰라, 나도. 환장하겠네. 벌써 세 번째였다. 세 명의 플레이어가 죽어나갔다. 이제는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북부 전체가 떠들썩할 지경이었다.
전정국과의 협력을 약속한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이틀 새 다시금 일어난 학생 살인사건에, 학교를 비롯한 북부의 분위기가 배는 살벌해졌다.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몇몇 가문에서는 아카데미의 휴교를 주장하기도 했다. 유례없는 살인사건이 아카데미 내에서만 3번, 가문의 귀한 핏줄을 그런 위험한 곳에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찌 이해를 하지 못할까,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인재 중에서도 인재였다. 가족애 따위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서도 지식은 곧 힘이 되는 법이니, 가문의 아까운 전력을 하나 잃을 수 없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강경했다. 오백 년 영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상 첫 휴교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영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알량한 사유가 아닌, 아카데미는 위험하지 않으며 뒷산의 짐승들을 토벌 중이라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았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오르테 공작가 또한 정보 면에서는 그 어떤 가문에도 뒤처지지 않는 가문이라는 것이었다.
"진이 공작가로 돌아가쟤."
"…퀘스트는 어쩌고?"
"그러니까, 망했다고. 나도 그 범인인지 뭔지, 플레이어를 죽인 놈이 이렇게까지 날 찾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지."
"……."
"내가 아니었어. 내가 흔적을 남기기 전부터 다른 목표물이 있었던 거야."
데온, 이번에 죽은 남학생의 이름이었다. 평민 출신의 아카데미 학생까지 죽어나가자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한층 더 흉흉해졌다. 이유도 모르고, 대상이 한정된 것도 아닌, 무차별적인 살인. 물론 그 이면에는 '플레이어'만을 노린다는 전제가 깔려있긴 했으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무차별적인 살인으로 보일 것이었다.
"진정해, 4일이나 남았고, 우리 쪽에서도 할 수 있는 건 분명히 있을 거고…,"
"4일 밖에겠지. 그 사이에 전정국, 너, 나를 제외한 두 명이 죽어버리면, 우린 셋밖에 남지 않는 셈이잖아."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기라도 해야지. 잘 생각해 봐, 원래 목표였던 데온이 죽었어. 이제 진짜 다음 목표가 너 일 수도 있다는 소리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거."
"언제부터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반가운 소리가 됐는데?"
"저, 저기…,"
어깨를 소심하게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여자애였다. 눈을 반쯤 가릴 정도로 덥수룩한 앞머리에, 정돈되지 않은 붉은 머리카락.
"유, 율리아 오, 오르테 공녀님, 마, 맞으시, 죠?"
"…그런데?"
"이, 이, 이거…,"
소녀가 구깃구깃하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샐러드를 휘적거리던 포크를 내려놓고는 그 종이를 건네받았다. 뭐지,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종이를 펼쳐본 내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열한시, 동쪽 정원.'
한국어였다.
"…이걸 왜 나한테?"
"저, 저는 모, 모르겠, 어요! 가, 갑자기, 후, 후드를 뒤집어 쓰, 쓴 분이 오, 오셔서, 저더러 이걸 조, 좀, 전해 다, 달라고…!"
"목소리를 들었어?"
"화, 확실하진 아, 않지만, 남자 부, 분 이셨던 것, 가, 같아요!"
김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쪽지를 바라보는 김태형에 그 쪽지를 그에게 건네자, 그가 안에 적힌 문장 한 줄을 읽어내려갔다. 아무도 읽을 수 없도록, 숫자조차 한국어로 쓰인 문장.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래, 고마워. 이만 가봐도 돼."
"네, 네…!"
전정국의 쪽지는 아니었다. 그는 내 기숙사로 직접 찾아오면 찾아왔지, 이런 쪽지를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 그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포커 게임을 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플레이어겠지?"
"그렇겠지. 근데 쟤는 누구야?"
"누구?"
"나한테 이 쪽지 주고 간 여자애 말이야."
"아아,"
김태형이 쪽지를 잘게 찢으며 말했다.
"말더듬이 캐런?"
"말더듬이… 어떤 앤데?"
"딱히 말할 것도 없는데…. 그냥, 귀족 출신이긴 한데, 말더듬이라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사교 모임이나, 뭐 그런 데서도 자주 괴롭힘당하는 것 같던데."
"아하…,"
"남작가 출신일걸? 캐런 케틀린. 소문에는 말 더듬는 걸 완전히 고쳤다고 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네."
그렇구나, 내가 대답했다. 나는 한쪽 손에 턱을 괸 채, 점점 멀어져 가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를 눈에 담았다. 소심해 보이는 발걸음, 구부정한 허리, 덥수룩한 머리카락, 이리저리 부딪히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하며 허리를 숙이는 그 모습을 보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샐러드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왜 하필 저 애였을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면서.
또다시, 이유 모를 위화감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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