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여주는 성현에게서 온 메시지를 한참 동안 확인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확인하지 않은 게 아니라,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휴대폰 화면 위에는 어젯밤 마지막으로 온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집에 들어갔으면 답장만 해요.” 짧은 문장이었다. 화난 것도 아니고, 다정한 것도 아닌데 여주는 그 문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어요.”라고 보냈고, 성현에게서는 곧바로 답장이 왔다. “다행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여주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천장을 바라봤다. 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계속 떠올랐다.
우리 이 결혼, 다시 생각해보면 안 돼요. 근데 지금 이대로는 못 하겠어요.
말해놓고도 스스로가 너무 비겁했다. 그만두자는 말도 아니고, 계속하자는 말도 아니었다. 성현에게 대답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셈이었다. 사실 여주는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을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너무 진짜가 되고 싶어서 무서운 거라는 걸.
점심쯤, 웨딩플래너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식 전 최종 확인 때문에 오늘 안으로 답해야 할 항목이 몇 개 있다고 했다. 여주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체크리스트를 열지 못했다. 신부 입장곡, 부케 색감, 혼주석 배치, 폐백 여부. 하나하나 현실적인 단어들이 눈앞에 쌓일수록 더 숨이 막혔다. 이 모든 걸 계속 진행해도 되는 걸까. 성현이 정말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결국 여주는 옷장을 열었다. 며칠 전 성현이 맡겨두고 간 재킷이 보였다. 돌려준다고 했는데 아직 돌려주지 못한 옷이었다. 여주는 재킷을 꺼내 들었다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하나가 떨어지는 걸 봤다. 처음엔 영수증인 줄 알았다. 그런데 펼쳐본 순간, 여주의 손끝이 멈췄다. 그건 드레스샵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한 작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여주는 두 번째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성현은 옆에 서 있지 않았다. 대신 거울 한쪽에 희미하게 비친 성현의 시선만 보였다.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니라, 여주를 보고 있는 시선.
여주는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들고 있었다. 왜 이런 걸 갖고 있었을까. 왜 말하지 않았을까. 계약 때문에 하는 결혼이라면 굳이 이런 사진을 따로 챙길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만 착각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성현도, 자신처럼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여주는 놀라 사진을 쥔 채 현관 쪽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는 성현이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여주는 문을 열기 전 잠깐 망설였다. 지금 얼굴을 보면 또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도 문을 열었다. 성현은 여주를 보자마자 낮게 말했다. “괜찮아요?” 여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은 한참 동안 여주를 보다가 말했다. “어제 얘기, 오늘은 피하지 말고 끝까지 했으면 합니다.”
여주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성현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결혼 준비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여주는 그 서류들을 치우려다가 멈췄다. 어차피 피한다고 사라지는 문제도 아니었다.
성현의 시선이 여주 손에 들린 사진으로 향했다. 여주는 뒤늦게 손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성현은 조용히 물었다. “봤습니까?” “재킷 주머니에서 떨어졌어요.” “버리려고 넣어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가지고 있었어요?” 성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주는 그 침묵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성현은 낮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날, 예뻤으니까요.” 너무 짧고 단순한 말이었다. 그런데 여주는 그 말에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주 씨가 들은 통화 말입니다. 계약 끝나면 정리하겠다는 말.” 그 말이 나오자 여주의 손끝이 다시 굳었다.
성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주 씨를 정리하겠다는 뜻 아니었습니다. 계약이라는 핑계로 버티는 나를 정리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여주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처음엔 나도 이게 편할 줄 알았습니다. 서로 필요한 것만 맞추고, 감정은 끼워 넣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됐습니다.” 성현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여주를 봤다. “드레스샵에서도, 식장에서도, 여주 씨가 불안해할 때마다 내가 제일 먼저 신경 쓰였습니다. 계약 때문이라고 말하면 쉬울 것 같아서 그렇게 굴었는데,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여주의 목이 조용히 메었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으니 더 무서웠다. “그럼 왜 말 안 했어요?” “여주 씨가 이 결혼을 계약이라고 생각하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나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성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근데 지금은 아닙니다.” 여주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성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제처럼, 오늘도 기다렸다.
여주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바라봤다. 처음 서명하던 날에는 이 종이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 없이 시작하고, 감정 없이 끝낼 수 있게 해주는 안전장치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 계약서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숨기고, 서로를 오해하고, 가까워질수록 더 멀어지려 했다. 여주는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저는 이게 있으면 덜 무서울 줄 알았어요.” 성현은 조용히 여주를 봤다. “근데 이제는 이게 더 무서워요. 끝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성현의 표정이 흔들렸다.
“여주 씨.” “나도 모르겠어요. 성현 씨가 좋아진 건지, 이 상황에 휩쓸린 건지, 아니면 그냥 외로워서 그런 건지.” 여주는 애써 웃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근데 하나는 알아요. 어제 식장에서 돌아서는데, 성현 씨가 안 붙잡아서 너무 속상했어요. 붙잡아주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진짜 안 붙잡으니까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성현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성현이 천천히 다가와 여주 앞에 섰다. “붙잡으면, 도망갈까 봐 그랬습니다.” “뭐라고요?” “여주 씨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잡으면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될까 봐.” 성현은 아주 조심스럽게 여주의 손목 근처에 손을 올렸다. 잡는 게 아니라, 잡아도 되는지 묻는 사람처럼. “근데 어제 안 잡은 거 후회했습니다. 밤새.”
여주는 결국 눈을 피하지 못했다. 성현의 눈빛은 늘 차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여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현이 낮게 말했다. “나는 이 결혼, 계약으로 시작했어도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여주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성현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도 결정은 여주 씨가 했으면 합니다. 계속해도 되고, 멈춰도 됩니다. 다만 하나만 알고 있어요.” “뭘요.” “나는 도망갈 생각 없습니다.”
그날 저녁, 여주는 결국 웨딩플래너에게 답장을 보냈다. 식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다고. 다만 신랑 신부 입장곡은 조금 더 고민해보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여주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성현은 떠나기 전까지 계약서를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고 갔다. 찢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그건 아직 두 사람이 끝내야 할 숙제 같았다.
밤이 깊어졌을 때, 성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혼자 두고 와서 미안합니다.” 여주는 한참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같이 가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어디든요.” 여주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결혼식까지 엿새. 아직 모든 게 확실해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 이 결혼은 계약서 위에만 있지 않았다. 마음이, 아주 조금씩 그 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