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패를 손에 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끝에, 여주는 결심을 굳혔다.
더는 이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 원망과 그리움 사이를 오갈 수만은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여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단아, 채비해줘. 나 떠날 거야."
"네? 어딜요, 아가씨!"
"그 사람을 찾으러 갈 거야."
단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흔들림 없는 여주의 눈빛에 결국 더는 말리지 못했다.
"…알겠어요, 아가씨. 저도 같이 갈게요."
단이의 그 한마디에, 여주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여주는 아버지 앞으로 짧은 서찰 한 장을 남겼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찾지 말아 달라는 말뿐이었다.
*
행선지는 짐작뿐이었다.
손님으로 머물던 동안 그가 무심코 흘렸던 말들, 나루터를 오가던 뱃사공들의 소문, 조승학 잔당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는 풍문까지 — 여주는 그 모든 실마리를 하나하나 그러모았다.
그동안 모아둔 비상금을 챙겨, 단이만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장터에서, 객주에서, 낯선 사내의 인상착의를 묻고 다니는 나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붕대를 감았던 팔의 흉터가 옷깃에 스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저릿하게 되살아났다.
허탕만 치던 나흘째 밤, 여주는 객주 방 한구석에 주저앉아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아가씨, 오늘은 그만 쉬세요. 내일 또 찾으면 되잖아요."
단이의 다독임에도, 이대로 영영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이면, 여주는 어김없이 다시 신을 신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 분이라면, 며칠 전 나루터 근처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낯선 상인의 그 한마디에, 여주의 걸음이 빨라졌다.
*
나루터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 늘어선 낡은 객주들 사이, 인적 드문 뒷골목까지 뒤진 끝에 여주는 마침내 낡은 폐가 하나를 발견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자, 안에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낮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여주는 숨이 턱 막혔다.
"저예요."
범규의 눈이 커졌다. 손에 쥐었던 단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보름 사이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여, 여주 아가씨가…… 어떻게 여기를……"
"찾았어요. 겨우, 겨우 찾았어요."
참았던 눈물이 여주의 눈에서 왈칵 쏟아졌다.
범규는 몇 걸음 다가서다, 이내 멈춰 섰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얼굴 위에서 팽팽히 부딪혔다.
"아버지께…… 다 들었어요. 그날의 진실도, 당신이 누군지도."
"……"
"그러니 이제, 저도 돕고 싶어요."
범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안 됩니다."
단호한 그 한마디에, 여주는 말문이 막혔다.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아가씨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제 일이기도 해요! 우리 아버지의 침묵이 당신 가족을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저도 이 일에서 자유롭지 않아요."
"그래서 더더욱 안 됩니다."
범규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미 한 번, 아가씨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두 번은…… 두 번은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여주는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럼 혼자서는요? 이렇게 여위어가면서, 혼자 버티는 건 괜찮고요?"
범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저와 함께 움직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가씨가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저는 그냥……"
여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냥, 더는 혼자 두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범규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오늘은 여기서 묵으십시오. 이 밤에 낯선 길을 나서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숨어 지내는 처지에 남의 눈에 띌 객주를 드나들 수는 없었다.
낡은 폐가 안에는 방이 두 칸뿐이었다. 한쪽은 헛간을 겨우 손봐 만든 작은 골방이었다.
단이가 서둘러 그 골방을 차지하고 나니, 남은 건 범규가 지내던 방 하나뿐이었다.
"저는 마당에서 자겠습니다."
범규가 짐을 챙겨 나가려 하자, 여주가 다급히 그 소매를 붙잡았다.
"이 밤에 어딜 나가시게요. 그냥 방 안에서 주무세요."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한방에서……"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예요? 며칠을 제대로 못 주무셨을 거면서."
"그래도 이건 도리가 아닙니다."
"도리가 뭐가 중요해요! 이 밤에 밖에서 얼어 죽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잖아요."
범규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결국 실랑이 끝에, 범규는 방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댄 채 앉았고, 여주는 반대쪽에 이부자리를 폈다.
병풍 하나 없이, 사이에는 오직 어색한 침묵만이 놓여 있었다.
"…불편하시면 제가 나가서……"
"됐어요. 그냥 주무세요."
여주는 애써 새침하게 대꾸했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한참 후, 여주의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들었다.
범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야윈 뺨, 감긴 눈,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옅은 숨소리.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또다시 가슴속에서 부딪혔다.
이대로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수록 여주를 더 큰 위험에 옭아매는 일이 될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닿지 않을 그 한마디를 나직이 남긴 채, 범규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동트기 전, 옆방에 잠든 단이에게 여주를 부탁한다는 짧은 말만 남기고, 범규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