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맞으세요?"
여주가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범규는 한술 뜨다 말고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소금을 좀 빼먹으신 것 같은데요."
"네?"
당황한 여주의 얼굴을 보더니, 범규가 이내 픽 웃었다.
"장난입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손님, 지금 저 놀리신 거예요?"
"소인이 감히 어찌 아가씨를 놀리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능청스러운 말재간은 조금도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처연한 얼굴로 앓는 소리만 내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농은 잘도 하시네요."
"이래 봬도 웃는 게 특기라서요."
여주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밉지 않은 얼굴이었다.
*
그렇게 하루 이틀, 웃음 섞인 끼니가 쌓여갔다.
며칠이 지나자 범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만큼 몸이 회복되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못 견디는 사람처럼, 그는 틈만 나면 마당으로 나가 잔심부름을 거들었다.
"몸도 성치 않은데 그냥 쉬시라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요."
장작을 패다 말고 손을 다치기도 하고,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나르다 옷을 흠뻑 적시기도 했다.
그런데도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여주를 따라 웃었다.
서투른데도 어딘가 성실했다.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삐걱거리는 사립문 경첩을 손보겠다며 반나절을 매달려 있었다.
"그거 그냥 두어도 되는데요."
"한번 시작한 걸 어중간하게 두면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요."
결국 해가 뉘엿뉘엿할 때까지 씨름한 끝에, 문은 거짓말처럼 소리 없이 여닫혔다.
땀에 젖은 얼굴로 뿌듯하게 웃는 그를 보며, 여주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이가 슬쩍 귀띔했다.
"저 사람, 은근히 부지런하네요. 처음엔 행색만 보고 걱정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어르신도 요즘은 싫은 내색이 통 없으세요. 아가씨가 잘 돌봐서 그런가."
여주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정작 자신도 그 이유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손짓 하나 고집 하나까지 어딘가 낯이 익었다.
*
그날 저녁, 마당을 산책하던 여주는 우연히 앉아서 쉬는 그의 옆 얼굴을 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 붉은 노을 아래 홀로 앉은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낮 동안 그리 밝던 사람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여주는 새삼 놀랐다.
인기척을 느낀 범규가 뒤를 돌아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어 보였다.
"아가씨, 여긴 어쩐 일로."
"아니, 그냥……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요."
"기억도 없는 놈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농담처럼 넘기는 말투였지만, 여주는 그 웃음 뒤에 무언가 숨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정체 모를 익숙함이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마음을 건드렸다.
*
밤이 되면 범규는 홀로 툇마루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낮 동안은 웃고 떠드느라 잊고 있던 것들이, 밤이 되면 하나둘 되살아났다.
그는 문득 여주의 방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은 걸 보니, 그녀도 잠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잊은 줄 알았던 기억 하나가 저절로 떠올랐다.
반딧불이를 잡겠다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어린 범규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던 날이었다.
무릎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걸 보고 울먹이는 범규에게, 여주는 머리에서 푼 댕기로 상처를 싸매주며 웃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프게 해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데, 그 말 한마디에 범규는 울음을 뚝 그쳤었다.
그때는 세상이 그렇게 다정할 줄로만 알았다.
*
그러나 기억은 곧 다른 곳으로 미끄러졌다.
눈을 뜨니 손에 꼭 쥐고 있던 그 댕기가 불에 타고 있었다
지붕 위로 치솟던 불꽃, 매캐한 연기, 아버지를 끌고 가던 관군들의 고함.
그리고 그를 감싸 안은 채 화살을 맞고 쓰러지던 어머니의 등.
가슴이 갑자기 조여왔다. 숨을 들이쉬어도 폐까지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떨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심장이 귓속에서 뛰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범규는 저도 모르게 품속으로 손을 넣어 옥패를 움켜쥐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름마저 버려야 했던 그날의 산길이 서서히 멀어지고, 다시 지금 이 툇마루로 돌아왔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이 집에서, 이 얼굴 앞에서, 이렇게라도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길 줄은 몰랐으니까.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범규는 내일이 기다려졌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애써 이름 붙이지 않은 채로.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이 거짓말을 계속 이어갈 자신이 그에게는 아직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만큼은, 이 평온이 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