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8화. 흔적도 없이

대문 밖, 인적 없는 길을 한참 바라보던 여주는 문득 몸을 돌렸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주는 다시 사랑채로 향했다.

 

"아버지."

 

문을 열어젖히자, 김유형이 흠칫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손님, 저를 구해준 사람이에요. 목숨 걸고 저를 지켜준 사람이라고요."

"……"

"그런 사람을 왜 그렇게 급하게 내보내신 거예요? 인사할 틈도, 몸 추스를 틈도 안 주시고."

 

김유형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다."

"나서면 안 되는 일이라니요. 저 때문에 다친 사람이잖아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여주는 애써 삼켰다.

 

"제발요, 아버지. 이유만이라도 말씀해주세요."

"…그만하거라."

 

돌아선 아버지의 등이, 그 어느 때보다 완강했다.

더는 이곳에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여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몸이 다 낫기를 기다릴 여유 같은 건, 지금 여주에게 없었다.

 

"찾아야 해. 내가 직접."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여주는, 붕대 감긴 팔을 옷깃으로 여미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따라 나온 단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붙잡았다.

 

"아가씨,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딜 가시게요!"

"괜찮아. 조금만 걸으면 돼."

 

거짓말이었다.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단이는 결국 뒤따라나서며 여주의 팔을 부축했다.

 

 

 

*

 

 

 

 

장터를 지나 나루터까지, 여주는 온 마을을 헤맸다.

붕대 감긴 팔이 옷깃에 스칠 때마다 통증이 저릿하게 번졌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낯선 사내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을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전에 왕진을 왔던 의원조차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몰랐는데요. 워낙 몸이 남달랐으니, 어디서든 잘 버티고 있겠지요."

 

위로가 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이 더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몸이 남다르다는 그 말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해가 벌써 중천을 지나고 있었지만, 여주는 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허기도, 다리의 통증도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른 저잣거리 객주에서도, 그런 손님은 묵은 적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발걸음은 결국 그날 밤 쫓기던 산길로, 그 낡은 당집 앞으로 향했다.

 

 

 

*

 

 

 

당집은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낮에 보니 그날 밤의 다급함이 거짓말 같을 만큼, 나무 그늘 아래는 평온하기만 했다.

여주는 그가 서 있던 자리, 낮은 목소리가 오가던 그 자리를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조용히." 하며 서늘하게 굳었던 그 눈빛이 이제와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두려웠던 그 낯섦이, 지금은 오히려 그리웠다.

적어도 그 얼굴은, 살아서 이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한참을 서성이던 여주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흙에 반쯤 묻힌 나무 조각이었다.

주워 든 손바닥 위, 반으로 쪼개진 나무 패에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님의 옥패에서 보았던, 바로 그 문양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오갔던 낯선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이것이 그가 쫓던 무언가와, 혹은 그를 쫓던 무언가와 관련된 물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억을 잃었다던 사람이 왜 이런 표식을 지닌 이와 몰래 만났던 걸까.

여주는 나무 패를 옷고름 안쪽에 단단히 여며 넣고 몸을 일으켰다.

 

 

 

*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여주는 나무 패를 손에 꼭 쥔 채 산을 내려와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채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김유형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여주야, 이 시간까지 대체 어딜……"

 

여주는 대답 대신 나무 패를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이거요. 손님의 옥패랑 같은 문양이에요.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었어요."

 

김유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떨리는 손끝으로 나무 패를 받아 든 그는, 그것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채 한참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익숙한 문양을 알아본 자의 얼굴이었다.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그 위로 스쳤다.

 

"아버지, 대체 그 손님이 누구예요?"

"……"

"우리 집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왜 그렇게 얼굴이 하얘지시는데요?"

 

떨리는 목소리로 다그치는 딸 앞에서, 김유형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도 더 크게, 여주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한 번도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다정하고 온화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 무섭게 왜 그러세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듣고 싶지 않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김유형은 나무 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지금 말씀해주세요. 더는 못 기다려요."

 

무언가 거대한 것이, 평온했던 이 집 안에 조용히 균열을 내고 있는 듯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주는 그 균열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는 알아야만 했다.

 

 

 


 

 

 

ㅎㅎ 이번 화는 범규 등장씬이 없어서 사진이 많이 없네요 ㅠㅠ

그래도 곧 과거도 풀리고 전개도 진행 될 예정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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