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ú y yo y él

02




“…진짜?”

김운학 손에 들린 검은 봉투가 툭. 힘 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난 차마 걔 눈을 쳐다보기가 미안해서 고갤 푹 숙였다. 응. 수아 남자친구 있대. 입 안 잘근 씹는데 뒷목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들키면 어떡하지.
만약 김운학이 걔랑 친해지기라도 하면.
아.
다행히 그럴 일은 없겠다.

…..”

걔 얘기 하나만으로 이렇게 벌벌 떠는데. 어떻게 친해지겠어. 달달 흔들리는 손으로 떨어진 봉투 주운 김운학이 애써 웃고는. 알려줘서 고맙다며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네길래 받아들었다. 양심도 없이.
미세하게 붉어진 걔 눈시울 보는데 내 마음이 더 안 좋아져서 또 시선을 내렸다. 이젠 내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심장이 뜨거워 화상이라도 입은 듯하다. 눈치보느라 숨을 못 쉬어 머리가 지끈거린다.

김운학은 잠깐 고민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굴었다.

“에잇. 기분 별로니까 너랑 노래방이나 가야겠다.”

같이 가줄 거지? 안 가면 진짜 섭섭하다. 누가 보면 정말 다 떨쳐낸 것 같은데. 난 얘가 이러는 게 더 싫었다. 차라리 대놓고 울면 위로라도 해줄 수 있고. 미안하단 말이라도 대충 할 수 있는데. 고작 입꼬리 떨리는 걸로 나 혼자 알아보고 죄책감 가지는 게. 눈치만 봐야 하는 게 너무 답답하다. 네가 티를 안 내면 난 아무것도 못해. 솔직히 김운학 너도 알잖아. 나 같은 건 현수아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거.
김운학은 이런 내 맘 하나도 모르고 어깨를 감싼다. 나도 여잔데. 엄연한 이성인데. 이런 식으로 편하게 대하는 게 더 열받는다.
현수아는 그렇게 조심조심 다루면서 왜 나는 막 대해? 나한테는 이 말 저 말 다 뱉으면서. 왜 걔한테는 준비한 말조차 아끼는 거냐고.

울컥하는 마음 감추고 고개 돌려 김운학을 쳐다봤다. 코앞에 있는 뺨. 찡해보이는 눈가. 벌겋게 올라온 홍조. 목부터 귀까지 안 벌건 부분이 없다. 현수아 이름 하나가 이 정도로 큰 파장이라는 게 미치도록 속상했다. 또 아랫입술을 물고. 반대로 고갤 돌린다. 내가 포기하든가 네가 포기하든가 하나만 할 수 없을까. 동시에 이러는 거 정말 우리 둘다한테 너무 잔인한 것 같은데. 안 그래?


우울한 기분 달고 한참이나 놀았다. 집에 돌아와선 또 멍하니 천장이나 본다. 그러면 김운학 얼굴이 보이는 착각이 들어서 질끈. 눈을 감으면. 캄캄한 암흑 사이에 김운학 얼굴만 둥둥 떠다니듯 생생히 떠오른다.

“아… 진짜…”

결국엔 머리 마구 헝클이며 몸을 일으킨다. 김운학 진짜 너무 싫어. 진짜 짱 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 제발 싫다고 그만 좀 생각나라고. 와중에 김운학 옆에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현수아. 김운학은 그리 잘생기지도 않은 반면 현수아는 학교 떠들썩하게 만드는 미녀인데. 대체 이 둘이 왜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냥 둘다 내 머리에서 떠났으면 했다.

그러고 잠에 들면.

“나한테 왜 그랬어?“

얼마 가지 못해 눈을 번뜩 뜬다. 꿈… 꿈이야. 꿈이야. 진정해. 흠뻑 젖은 티셔츠 펄럭이며 쿵쾅대는 심장 안심시켰다. 매일 밤 꿈에 나타나선 나를 바라보는 김운학. 그리고 그 손을 잡고 있는 현수아. 이 둘이 나를 바라본다. 텅 빈 눈동자로. 사람 하나 묻을 듯이 쳐다보곤 같은 말만 반복한다. 나한테 왜 그랬냐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너야말로 먼저 날 막 대했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내 맘 문드러지게 했잖아. 이건, 너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그런 거잖아.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김여주.”

항상 걔 반만 찾아가던 김운학이 처음으로 날 찾아왔다.

“얘기 좀 해.”

단단히 화가 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