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eno

05 Calidez

***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거실은 쥐죽은듯 조용하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살지 않는 것처럼 집안은 차가운 공기만 맴돌며 썰렁하기만 하다.

뱀파이어들은 원래 이렇게 춥게 사는 건가.

여주가 의문을 품으며 옅은 추위에 팔로 제 몸을 감싼다.

그렇게 거실을 어슬렁거리자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덥썩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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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뭘 그렇게 어슬렁거려요?

지수였다.

이여주

아… 그냥 좀 출출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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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집에는 커피나 차같은 거나 피밖에 없는데.

그럼 그렇지.

뱀파이어들이 사는 집에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만한 게 있을리가 없다.

이여주

그럼 저 주변에 편의점이라도 갔다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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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마음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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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그런 것까지 통제할 자격은 저희들에게 없으니까.

이여주

네, 뭐, 그렇죠.

맞는 말임에도 어쩐지 이런 뱀파이어가, 사람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였던 뱀파이어가 그런 말을 하니 여주는 묘한 기분이 드는 것만 같다.

이여주

그러고 보니 정한… 씨는요?

이여주

아직도 자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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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네, 아무래도 아직 새벽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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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그분은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잘 거예요.

이여주

되게 잠꾸러기인가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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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뱀파이어니까요.

여주는 그의 말에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 이상한 게 걸려 지수를 똑바로 마주보고는 묻는다.

이여주

지수 씨도 뱀파이어 아니에요?

그는 오랜 침묵을 유지한다.

별로 대답하고 싶은 눈치가 아닌 듯하다.

이여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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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여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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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우리 너무 서로에 대해 깊게 알아가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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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지킬 선은 지키자구요.

이여주

그래요. 저도 원하던 바예요.

둘은 서로에 대해 깊게 알고 싶지도, 자신의 깊은 얘기를 알려주고 싶지도 않은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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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어서오세요, GS13입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한 청년이 여주를 밝게 맞이한다.

새벽부터 에너지가 넘치는 게 그저 대단할 뿐이다.

원래부터 열정이 넘치는 청년인지 여주가 라면 코너에서 고를 때도 삼각김밥을 고를 때도 눈을 떼질 못 한다.

손님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고 싶다는 눈빛이다.

청년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여주에겐 그저 부담스럽기만 하다.

여주는 원래 조용한 걸 좋아하고 밝은 성격의 사람과 있으면 기가 빨리는 타입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주는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기가 빨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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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다해서 2,700원입니다~!!

이렇게까지 패기 넘치게 가격을 말하는 것은 여주에게 있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난생처음 본 거라 여주는 꽤 당황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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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이여주

네…

여주는 기가 빨려 대답할 힘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런 그녀의 상황을 모르고 청년은 그저 기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자기가 기운을 돋구어 줘야겠구나 생각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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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자, 요건 서비스~~!!

청년은 자신이 먹으려고 챙겨둔 비타500을 그녀의 봉투 안에 슬쩍 담는다.

이여주

안 주셔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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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드세요~ 그래야 힘이 나죠!!

본인 때문에 기운이 점점 빠지고 있는 건데.

이여주

이러면 사장님한테 혼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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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여기 편의점 사장님이 저희 아버지라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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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그리고 어차피 제 돈으로 계산한 거였어요.

여주에게는 한없이 부담스러운 따뜻함이다.

하지만 이런 부담스러운 따뜻함도 때로는 괜찮은 것 같다.

요즘따라 자신의 인생이 기구하단 걸 더욱 느끼고 있을 때여서 그런 걸까.

여주는 더 이상의 거절은 하지 않고 청년의 따뜻함을 받아들인다.

이여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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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

다음에 또 오세요~~!!

청년이 밝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넨다.

수많은 손님들에게 똑같이 건네는 인사일 뿐일 텐데도,

여주는 그 수많은 손님들 중 하나일 뿐일 텐데도

여주는 그의 인사가 특별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여주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

***

여전히 썰렁한 집안에 들어선 여주는 오자마자 컵라면에 부을 물부터 끓인다.

그리곤 잠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마당이 있는 집이라 그런지 창밖은 푸르른 수풀로 가득하다.

하루종일 이렇게 창밖만 바라봐도 지겹지 않을 것만 같이 수풀은 햇빛을 가득 머금으며 영롱한 빛을 낸다.

이여주

예쁘네…

이 집에 사는 뱀파이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이여주

아, 다 끓었나 보네.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어느새 물은 끓고 있었다.

여주는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는 컵라면에 물을 부어넣는다.

정말 평화로운 일상이다.

여주는 라면이 익기까지 기다리면서도 생각한다.

평소보다도 더 평소같은 평범한 일상같다고.

아마 평소같았으면 이때쯤에 사채업자들이 쳐들어와서는 창문이고 라면이고 뭐고 싹 다 깨트리거나 엎어버렸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아침 식사라니.

여주는 라면과 삼각김밥을 어느새 다 먹어치우고 정리를 한 뒤 소파에 앉아 평화를 만끽한다.

이여주

…좋네.

푸른 수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지 않으며 폭신한 소파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여주는 괜찮은 것 같았다.

언제나 일상이 바뀌길 기도했지만

왠지 오늘따라 여주는 이 일상이, 지금과 같은 일상이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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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아가씨, 소파가 그렇게 좋아?

정한의 말에 여주는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다.

아무래도 창밖을 구경하다 햇살의 따뜻함과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움에 잠에 든 듯하다.

그렇게 해까지 떨어졌는지 정한은 여주의 옆에 앉아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이여주

아… 벌써 저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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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나 배고파,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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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손 좀 잡아줘.

여주는 잠시 그게 뭔 소린가 고민하다가 이놈은 뱀파이어지, 라며 새삼 깨닫는다.

이여주

근데 정말 저랑 이렇게 손만 잡는 걸로 배고픈 게 채워져요?

여주는 정한의 손을 맞잡으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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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응, 이걸로 충분해.

이여주

신기하네요.

정한은 방금 잠에서 깨서 그런지 나른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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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치, 나도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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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굳이 피를 먹지 않아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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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덕분에 수고를 덜겠어.

이여주

…그 덕분이란 말은 꽤 기분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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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래? 앞으로 많이 해야겠네.

정한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또 다시 미소를 머금는다.

이여주

플러팅이 습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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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내가 사랑에 목이 좀 마르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한의 눈동자는 공허하기만 하다.

여주도 그걸 느끼는지 그 후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서로에 대해 깊게 알아가고 싶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