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eno
06 Dos Caras (1)


***

고요한 집안에서 여주의 배꼽시계가 울려퍼진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을 시간이니 생리현상으로 일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의 꼬르륵거리는 소리란 당사자에게는 아주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여주는 지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다.


윤정한
아가씨, 배고팠구나?

정한은 웃음을 최대한으로 참으며 말한다.


홍지수
…저녁 먹을 시간이긴 하니까.

그렇게 차갑고 선만 그을 줄 알던 지수 또한 웃음을 참느라 힘들어 보인다.

여기서 즐겁지 않고 부끄러워 죽겠는 건 여주뿐인가 보다.

이여주
…당연히 배고프죠.

이여주
아까 아침으로 컵라면이랑 삼각김밥 먹은 것 말고는 먹은 게 없는걸요.

이여주
집에 진짜 아무것도 없던데요.

부끄러움에 괜한 짜증이 섞여있는 말투다.


윤정한
배 많이 고팠겠네.

정한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곤 여주에게 건넨다.


윤정한
앞으로 이 카드로 뭐든 마음대로 사.


윤정한
배달시켜서 뭘 먹든 아가씨 마음대로 해.

이여주
그럼 오늘 저녁도 제 마음대로 시켜먹으면 되는 건가요?


윤정한
오늘 저녁은 특별히 외식이나 하는 게 어때?

이여주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윤정한
가자, 지수야.

정한은 지수에겐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차 키를 건넨다.

이여주
지수 씨도 동의한 거예요?

이여주
외식하는 거에?


윤정한
쟤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윤정한
그치, 지수야?

정한의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이 서린다.


홍지수
…맞습니다.

아까 여주의 꼬르륵 소리에 웃음을 참던 그는 어디 가고 어느새 차가움만을 띠고 있다.

평소와 같이 굳은 얼굴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를 흐르던 기류가 더욱 차가워진 듯하다.

바뀐 분위기를 느낀 여주는 괜한 질문을 했나 후회만 될 뿐이다.

***

***

이여주
외식하는데 이렇게 비싼… 곳까지 올 필요가 있나요?


윤정한
이왕 외식하는 거 비싼 데서 먹는 게 좋지.

이여주
피만 먹으면서 그런 것까지 신경쓰는 게 좀 웃기긴 하네요.


윤정한
우리도 음식 맛은 느낄 줄 알아.


윤정한
배가 부르지 않을 뿐이지.

이여주
그건 부럽네요.

정한은 옅은 미소를 날린 뒤 손을 살짝 들어 직원을 부른다.


이서영
네, 주문하시겠습니까?


윤정한
A코스로 부탁드립니다.


이서영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메뉴판을 치우며 정한을 곁눈질한다.

아무래도 일반 사람이 들으면 수상쩍어할 둘의 대화를 어쩌다 들은 듯하다.

이여주
제가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네요.

이여주
이런 밖에서…


윤정한
상관없어.


윤정한
누가 감히 날 사냥하겠어.

정한의 눈에서 자신감과 살기가 이글거린다.

누가 자신을 노린다면 바로 죽여버릴 기세다.

어제 한 남성을 처절하게 짓밟고 죽인 것처럼.

***

많은 코스 요리들이 지나가고, 그들은 그저 별말 없이 침묵만을 유지하며 먹는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친한 사이가 되고 싶지도 않으니 굳이 많은 말을 하진 않는 거겠지.


이서영
이제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서영
굽기 정도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이여주
전… 미디움으로 해 주세요.


홍지수
전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윤정한
전 레어로 부탁해요.


이서영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떠나자 여주는 의외라는 듯 약간 놀라며 말한다.

이여주
지수 씨도 레어로 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홍지수
그게 핏물은 아니잖아요.

그의 짧고 간결한 대답에 여주는 할 말이 없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윤정한
너네 되게 잘 어울린다.

이여주
대체 어디가요?

여주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내뱉는다.

지수 또한 그의 말이 어이가 없고 뭘 보고 그렇게 말한 건지 이해도 되질 않아 미간을 찌푸린다.


윤정한
둘이 말하는 게 너무 웃겨.


윤정한
나중에 둘이 같이 개그 프로에 나가는 게 어때?

이여주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정한 씨.


윤정한
아가씨는 너무 냉랭한 것 같아~

이런 농담이 오고 감에도 그들의 사이는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마 여주도 그가 어색한 침묵은 싫고 심심해서 별 의미없이 내던진 말이란 것을 알 거다.


이서영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이서영
맛있게 드세요.

직원은 기계적인 미소를 짓고 스테이크를 앞에 놔두고선 떠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의 눈길은 정한을 향한다.

누가 봐도 빛나는 그의 외모긴 하지만 직원은 사랑에 빠져서 쳐다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증오를 가득 품은 눈빛이다.

***


김민규
여기서 만나네?

어디선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민규가 껄렁대며 그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윤정한
네가 여긴 왜 왔어?


김민규
말 진짜 섭섭하게 하네~


김민규
그냥 좀 높으신 분이랑 밥 먹으러 왔지.

민규의 눈은 어느새 여주를 향한다.

여전히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이다.


김민규
그쪽도 와 있었네?


김민규
우리 저번에 통성명 못 했잖아요. 그쵸.


김민규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알아요?

네 명이 앉는 테이블이라 한 쪽 의자가 남아있었던 탓에 민규는 여주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들이댄다.

이여주
되게 부담스러워요.


김민규
우와, 엄청 솔직해~


김민규
난 김민규예요.


김민규
그쪽은?

이여주
…이여주입니다.


김민규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민규가 여주에게 악수하자며 손을 건넨다.

여주는 그의 손을 잡아야 하나 머뭇거린다.

김민규도 뱀파이어니까 분명 여주와 살갗이 맞닿는다면 전에는 느껴보지 못 했을 포만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여주에게 더욱 많은 호기심이 생기겠지.

그리고 여주는 그의 시도때도 없는 악수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윤정한
민규야, 그쯤 해.


윤정한
괜히 친해지려고 하지 말고 가.


윤정한
높으신 분이 기다리겠다.

정한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둘의 악수를 막는다.


김민규
형, 혹시 질투해?


김민규
진짜로 애인인 거야?

민규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서린다.

정한과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처음 보는 모습에 흥미가 돋는 것이다.


김민규
근데 그럼 형 애인도 알아?


김민규
형이……


윤정한
민규야.

정한은 핏빛과도 같은 육즙이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를 썰며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한다.

그의 목소리와 칼을 쥔 손에는 살기가 가득 담겨있는 듯 보인다.


윤정한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윤정한
그쯤 해.

정한은 오직 핏빛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에 시선을 고정하며 경고한다.

그의 눈을 마주보지 않아도 민규는 엄청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민규
…어.

이번에도 장난기 가득한 말로 되받아칠 줄 알았던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당황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대답한다.

여주는 의외인 민규의 모습에 놀라면서 정한의 살기에 공포를 느꼈고,

그의 심기를 거스르진 말아야겠다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