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수빈] 첫사랑 上

* 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모자이크 X)
그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한 여름날. 희고 투명한 피부와 찰랑거리는 머릿결, 맑고 검은 눈동자까지. 홀렸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그 아이의 첫인상은 이렇다.
그의 이름은 '수빈'
하얗고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무엇보다도 맑고 순수한 그의 눈빛이 머리 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여주는 어렸을 때부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안 좋은 건 다 경험해 보았고, 그래서 오히려 정반대인 그에게 더 마음이 간 것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아빠는 항상 술만 마시면 여주를 때렸다. 집 안에 있는 물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족족. 어느 날은 술병으로 여주를 때리다가 깨져버려서 왼쪽 볼에 긴 흉터도 생겼다. 아빠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그대로 술이 깼는지 묵묵히 여주를 치료해주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땐 결코 나쁜 아버진 아니었다. 술만 마시면 변했다.
이 멍청한 성격은 아빠 덕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매일 맞기만 하는데 가정교육을 어떻게 잘 받았을 수 있었을까.
"야 이 개 같은 년아. 너 때문에 서혜란. 서혜란 그년이 나간 거라고. 네 년 때문에!"
"하... 씨발 진짜..."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씨발? 씨발? 이 미친년이 쳐 돌았나."
"아 진짜... 좀 작작 하라고... 지겨워서 못 살겠다."
아빠는 여주 말을 듣자마자 화나서 손을 들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지겹고도 갑갑한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바로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주는 달리고 달려서 아빠를 겨우 따돌렸다.
그렇게 아빠가 오는지 확인을 하며 뒤로 몇 발자국을 뗐는데, 등 뒤 굉장히 큰 물체가 느껴졌고 함께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으... 흐... 으어.."
"아야...아파라...."
"저 괜찮으세요..?.."
"...윽... 그쪽이 더 심한 것 같은데..."
"...네? 아... 이 정도야 내버려 두면 저절로 낫는데요 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아니라...."
"네?..."
"하… 그냥 저 따라와요. 다리 치료해드릴게요."
"음... 어... 네 뭐... 그래요."
수빈은 여주와 함께 여주의 아지트로 향했다. 둘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아파트로 갔다. 그곳은 좀 더럽긴 했지만 침대, 서랍, 카펫 등등 당장 살라고 하기엔 꽤 지낼만 한 곳이었다. 여주는 자신의 아지트에 누군가를 데려온 것은 처음이라 어색해 애꿎은 허벅지만 탁탁치고 있었다.
"구급상자가- 어디 있더라.."
수빈은 여주가 직접 다 꾸며놓은 방을 살펴보았다.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침대와 서랍 위에 올려두었다. 수빈은 어렸을 적 자신이 좋아했던 토끼 인형을 보았다.
"우와 이 토끼 아는 사람 잘 없는 걸로 아는데."
"그 토끼 인형. 아빠가 어릴 때 줬던 거야."
수빈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여주는 구급상자에서 붕대와 약들을 꺼냈다. 아빠가 다친 여주를 치료해 준 적이 많아, 여주한테는 붕대 두르는 방법이 쉬웠다. 그러나 생각보다 수빈의 다리엔 피가 많이 나고 있었다.
"아... 좀 많이 나네."
여주는 빨간약을 꺼내 수빈의 다리에 발랐다. 수빈은 다른 것으로 소독할 때는 참을만 했지만 이번엔 따가워 몸을 움츠렸다. 그런 수빈을 여주는 쳐다보았다.
"엄살은."
"그나저나, 너 몇살인데 나한테 말 놓는거냐?"
"나 18."
"어, 나돈데. 근데 왜 난 너를 학교에서 본 적이 없지. 나 너 처음 봐."
"나 학교 안 다니거든."
"어? 자퇴한 거야..?"
"응."
"아... 좋은 쪽으로..?"
"아니."
"음... 혹시 이름이 뭐야? 난 최수빈이라고 하는데."
"여주. 김여주."
수빈은 마음속으로 여주의 이름을 되새겼다.
치료가 끝난 여주는 구급상자를 서랍 위에 올려두고 수빈의 옆에 앉았다. 수빈은 어색해 머릿속에서 생각 나는 거 아무거나 말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급하게 도망가던 거야?"
"아...."
"왜, 뭔데."
"아빠 때문에."
"너희 아버님..?"
"응. 아빠가 쫓아온 거라고."
"그게 무슨.."
"아빠 술만 마시면 돌변하거든. 평소엔 멀쩡한데, 술만 마시면 그러니까 우리 엄마도 지쳐서 나갔어."
수빈은 왠지 모르게 잘못한 기분이 들어 눈치를 살피며, 창문을 보았다. 그때 깨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석양이 무척 예뻤다. 노란색으로 붉게 빛나던 태양은 저물고 있었고, 노을은 주홍과 하늘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여주가 있었다.
'예쁘다.'
•••
사실 여주는 예전에 아빠에게 자신을 왜 때리는 것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도 죽일 작정을 하고 패길래, 여주를 죽이려는 건지 그냥 분풀이인지 헷갈렸다. 좀 알기라도 하면 그나마 덜 아플까 생각했다.
근데, 그냥 내 눈빛이 싫어서 때리는 거라네.
엄마 생각난다고.
나를 딸 취급 하지도 않는 작자에게 더 이상 딸 노릇하기 싫었다. 집을 탈출한 건 몇 달 전부터 준비해오던 거였다. 미리 옷 몇벌과 돈을 일주일 전부터 아파트에 갖다 놓았었다. 매일같이 맞으면서 참았다. 며칠만 더 있으면 나는 해방이니까.
"나 한 7-8시엔 들어가야 해. 그래야 좀 덜 맞아."
"아, 응 알겠어. 잘...! 들어가고.."
"...응, 너도.”

**
다음 날
오후 2시 쯤, 아빠는 술을 마시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그 틈에 여주는 아파트로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웬일. 집에는 절대 오지도 않을 것 같던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엿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여주는 사지도 못할 명품 옷, 가방과 함께. 아빠가 그토록 부르고 원망하던 '서혜란' 아빠가 없는 게 운이 좋았다. 엄마가 들어오는 순간에 사실 그냥 어린 애처럼 울면서 안길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근데 엄마가 걸친 그 옷들 때문에 그 생각은 단번에 사라졌다. 이 구질구질하고도 뭣 같은 집구석에 그냥 두고 나간 것도 모자라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으니, 좆같아서 그냥 모른 척 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이게 잘 지낸 걸로 보이나…ㅋㅋ"
"..."
“뭐 하려고 다시 왔어. 그 잘생기고 돈 많은 아저씨랑 나갔잖아."
"그냥...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올 시간이 너무-"
"미안한데 그냥 나가줘.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내일 다시 올게. 다치지 말고."
다치지 말라는 엄마의 말에 헛웃음이 났다. 오늘로서 난 알았다. 엄마의 말이 그저 자신의 아픔까지 나에게 떠넘겨 주는 말로 밖에 안 느껴졌다. 더 이상 그녀가 나의 엄마로 생각되지 않았다.
며칠 뒤, 여주는 다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여주는 수빈을 찾아 돌아다녔다. 저 멀리 한 골목 가게 앞, 수빈과 17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애가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여주는 왜인지, 거기서 아는 척 하기가 좀 그랬다. 그 여자 애는 멀리서 보아도 피부가 하얗고, 찰랑찰랑 거리는 검정 머리, 무엇보다도 여주와는 정말 대비되었다. 자신이 보기엔 여주의 외모는 수빈도 아는 체 하기 부끄러울 외모였다. 그렇게 뒤를 돌던 찰나에 수빈이 여주를 알아보았다.
"어, 여주야...!"
그 말을 듣자마자 여주는 바로 도망을 쳤다. 왜인지 수빈에게 아는 체를 했다가는 동네 사람들이 뒤에서 수근댈 것 같아 바로 발을 빼버렸다. 나 같은 애가 이런 애를 좋아했다가 마을 사람들이 같이 욕하면 내 탓이기 때문이니까.
둘은 한참을 돌다, 결국엔 아파트로 오게 되었다. 설마 여기에 있을까 했지만 여주는 이곳에 있었다. 수빈은 여주에게 물었다.
"왜... 도망 간 거야?"
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쉽게 입은 떼어지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여주는 그를 좋아한다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내가... 더 잘 안다고..?"
수빈은 당황했다. 전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빈은 여주에게 잘못한 일이 없었다. 수빈은 문득 자신의 여동생이 떠올랐다. 여주와 마주치기 전 수빈은 동생과 함께 있었다.
"혹시 내 동생 때문에 도망간 거야?"
"동생...?"
"응, 아까 내 동생이랑 삼촌 가게에 있었거든."
"아... 아..!"
여주는 깨달았다는 듯, 그대로 동공이 흔들렸다. 괜한 오해를 한 자신이 부끄러워 몸이 좀 움츠러들었다. 수빈은 그런 여주가 귀여웠다. 평소보다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눈도 못 마주치는 여주를 놀리고 싶었다.
"왜, 여자친구인 줄 알았어?"
여주는 너무 정확하게 정곡을 찔러버린 수빈이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심지어 대답도 안 해서 그냥 인정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 순간 수빈은 크게 웃었다. 여주가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ㅋㅋㅋㅋㅋㅋㅋ아 귀엽네"
"..응?"
"....어?"
수빈도 당황했다. 생각으로만 말하던 걸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을 여주가 들어버렸다. 수빈은 자신이 귀엽네 라고 한 것인지 귀여워 라고 한 것인지 구분도 못 하고 있었다. 여주도 수빈이 너무 귀여웠다. 자신을 귀엽다고 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못하는 수빈이 멍청하게 짝이 없어보였다.
"너도."
"응?"
"너도 귀여워. 좀 많이."
여주의 얼굴은 까맣게 탔어도 토마토처럼 두 볼이 새빨게 져있었다. 여주는 얼굴이 빨개진 걸 눈치 채자마자 양볼을 두 손으로 가렸다. 여주는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시원했던 바람이 지금 여주에게는 덥고 찝찝하게 느껴졌다.
"좀, 덥지 않니?"
"그런가, 난 되게 시원한데."
여주는 수빈을 째려보았다. 그때 공중에 떠다니던 먼지가 여주의 머리에 붙었고, 수빈은 보자마자 여주의 머리로 손이 향했다. 그리고 여주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서로가 같은 기분이었고 서로를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땐 이미 수빈의 손과 입술은 여주에게 향하고 있었다. 둘은 입을 맞췄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7시. 여주는 눈을 잠깐 뜬 새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급하게 수빈과 입을 뗐다.
"미안... 음... 우리 나중에 다시 여기서 볼 수 있을까?"
"응, 당연하지. 언제든지 널 기다릴 수 있어."
"..고마워, 그리고 좋아해."
여주는 수빈에게 마음을 전하고 여전히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집으로 걸어갔다.
con.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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