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모음집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






쨍그랑-

들고 있던 와인잔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처럼.

-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나의 잘못이었을까?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새했던 그의 옆에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둘은 입을 맞추며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죽도록 미웠다. 내 전부였던 나의 가정을 망쳐버린 것은 오히려 고마웠다. 그저 그 여자는 참 쉽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게 분했다.

난 그에게 푹빠져 매번 나 자신을 끊임없이 고치려 들고 그 틀에 나 자신을 욱여넣는다. 들어가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어서.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끝까지 아꼈으면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어려워했다.





그를 놓아줄 때가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만나지 말 걸 하고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있었고, 정말 이제는 끝이라고 실감하기엔 너무 이른 거 같았다.

그래도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네가 내 부재에 울었으면, 나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난 깊은 잠에 들게 들었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꿈을 꾸었다.





/






" 윽.. "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떴다.
근데 나, 안죽은건가?


벌떡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하얀 낯선 공간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팔에는 링거가 꼽혀있었고, 옆에는 낯선 남자가 내
손을 잡은 채 잠들어있었다. 순간적으로 덮쳐오는 불안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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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 뜯지 말랬지. "
- 헉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뱉었다.
그 남자는 내가 깨어난 것에 안도라도 하는 듯 눈을 꼭 감았다. 


- 누구.. 세요?
“ …나잖아…. 여주야.. “
- 여주? 그게 뭔데요? 전 헤라인데...


그 남자는 나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어찌할 줄 몰라 눈을 돌리려는 데 벽에 걸려있는 거울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낯설었다. 아니 아주 많이.
그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 저기요….저는 누구인가요..? 

나의 물음에 그는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이 남자는 뭘까. 그리고 여긴 어딜까. 그리고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들의 답들을 찾아가야 했다.



•••




긴 정적을 깨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흰 가운을 입고 들어와서는 몇 가지의 질문을 했다. 그 질문들은 내가 답을 찾고 있는 질문들과 같았다. 당연히 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들은 이만 퇴원하라는 말을 건넸다.


“ .. 집에 가자 여주야. “

그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집이 어딘지 모른다고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



“ 헐….. ”

건물을 나오는 순간 본 이곳의 세계는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곳의 경색은 어쩌면 무서웠다. 하늘 끝까지 닿을 것만 같은 건물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래도 자기가 누군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괜스레 그 남자가 미웠다.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보려는데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건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 뒤에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어두컴컴한 집으로 들어가 불을 켰을 때 사실 깜짝 놀랐지만 어색한 기류 때문에 애써 참으며 쭈뼛쭈뼛 서있었다.

그가 짐을 내려놓고 의자로 가서 앉더니 옆자리를 툭툭 치는 게 꼭 옆에 앉으라는 것 같아 쪼르르 달려가서 앉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는 그의 모습에 나도 입을 꾹 다물고
애꿎은 손가락만 꾹꾹 눌러댔다.


“ .. 나는 정국이야, 전정국. ”
- …정국….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 나 누군지 모르겠지?? “

그는 장난투로 내게 물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더 슬퍼 보였다.
나는 몰라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러자 그는 괜찮다고 재차 말하며 날 달랬다.




“ 네 이름은 전여주야. “
- 전여주..이름 예쁘다.
” 그치?.. 근데 웃는 것도 얼마나 예쁜지. ”
-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였어?
“ ..항상 내 옆에서 웃어줄 거 같았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거 같은 그런 존재였어. “

그는 울음을 꾹 참으며 답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사랑할 거야?
“…”

그 질문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체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정국이였다. 나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언제 잠든 건지 어두컴컴하던 바깥이 밝아져 있었다.
근데 나 어제 침대에서 잤었던가?..


그때 덜컥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국이가 들어왔다

" 일어났어? 아침 먹고 학교 가자 "
- 학..교?



학교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달달한 빵 냄새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고 있는 정국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 학교가 뭐야?
" 가보면 알아 "
정국은 날 궁금하게 만드는 대답과 함께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

1달하고도 2주일이 지났다.
대학생활도 제법 잘하고 있었다. 정말 그저 평범한 21세기의 스물둘 같았다. 근데 요즈음 정국이가 이상하다. 곧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것 처럼 항상 불안해 보였다.



그러다 오늘 아침에 일이 터져버렸다.
강의 전에 시간이 남았길래 여느 때처럼 정국이랑
카페를 가서 주문을 하려는데

- 난 핫초코.. 너는?? 
...
- 야 전정국.

정국은 입술을 뜯으며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요즘 이런 일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아무 일도 없다고 웃기만 하는 정국이었기에 끝내 못 참고 터져버린 것이다.


- 전정국. 너 뭔데. 뭐가 불만인데. 얘기를 해
" 그런 거 아니야 여주야. 그냥 잠깐,
- 아니라고? 또 아니야? 너 나 자꾸 바보 만들래?
" 진짜 아니라고. "

그대로 정국을 놔두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강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


집으로 돌아가니 언제 또 뛰어온건지 소파에 앉아있는 정국이 보였다.

" 전여주. 이리와 "
- ..싫어.
" 그러면서 울고있잖아. "

갑자기 뚝 떨어진 미래세계에서 의지할 곳은 정국 하나밖에 없는데, 그마저 없어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입으로는 싫은 소리를 뱉으면서도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나를 정국이 꼭 안아주었을 때,
나는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다시 뛰어들었다.


•••



그해의 겨울이었다. 눈이 펑펑 오는 겨울날이었다.
창틀에 소복소복 쌓이는 눈송이들을 보며 정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삑삑삑 도어락 열리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나가는 나를 보고는 정국은 귀엽다는 듯이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 정국!! 눈!! 눈사람!! 눈사람 만들러 가자!!
" 그럴까? "

신난 강아지같이 폴짝폴짝 뛰며 창밖을 가리키는 나의 모습에 정국은 환하게 웃었다. 지금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밖으로 나가니 하얗고 하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못하는 게 없었던 너는 하얗고 큰 손으로 가뿐히 눈사람 몇 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반면에 나는 비뚤비뚤한 이상한 눈사람조차 겨우겨우 만들어내는 걸 보고는 너는 어린아이처럼 웃기도 했다.

•••

불을 끄고 탁상에 있는 무드 등 하나를 켰다.
그러고는 누워있는 너의 품에 들어가 세게 끌어안았다.

- .. 사랑해

정국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나도 어쩌면 예전의 그와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고 아꼈으면서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를 어려워했다.

" 나도 "
- 사랑한다구.
" 응 나도 "
- 어쭈? 사랑한다고!! 
" ㅋㅋㅋ 사랑해 나도 "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와 토닥토닥해주는 정국의 손길에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저 많은 날들 중 하나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특별한 날 같았다.



•••

새벽녘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극심한 고통에 잠을 깼다. 
다들 그거 알고있나? 사람은 자기가 죽기 전에 직감적으로 그걸 안다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서둘러 정국을 흔들어 깨웠다. 평소에 너는 잘 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잤었는데, 왜 깊게 자지 못했는지 내가 이름을 부르는 한마디에 깨어났다.

- 정국아...정..국아.. 
" 응 여주야. 괜찮아. 괜찮아.. "
- ..미..미안해...

끝까지 울음을 참던 정국이 미안하다는 말에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국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국이 울면 내가 더 속상해질까 봐. 그래서 일 것이다.

- 울지마 바보야...넌 웃는게 예뻐..
" 미안해..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

너와 이별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었다. 매년 그 해의 마지막 계절, 겨울에 항상 내 생각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먼저가서 기다릴게. 항상 그 자리에 지금 모습 그대로 언제까지나 기다릴게...
...
- 사랑해


정국의 품 안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체 나는 
무겁던 눈을 감았다.



/

여주가 처음 깨어나기 몇 시간 전,
병원에서 정국은 의사들에게서 말도 안 나올 만큼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었다.

" 길어도 2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 마음의 준비를 해두세요. "

여주 앞에서 그런 불안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고, 마지막 순간에도 잘 보내줄 수 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잊지는 말자. 우리가 기억하고, 세상이 기억할 거니까.



우리는 서로의 겨울이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겨울에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