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시작

거리를 건너오는 사람

스터디는 평소처럼 끝났다.

누구보다 먼저 노트를 덮고,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오늘은

그 사람이 먼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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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걷다가

내가 먼저 속도를 늦췄다.

 

한 걸음 거리로 나란히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근데 이상하게,

그 침묵이 이번엔 다르게 느껴졌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실수 안 했네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

“어제는 그냥, 졸려서요. 진짜.”

 

“아니요.

어제도 오늘도, 그냥 당신 같았어요.”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나 지금 좀 갑자기 같아요?”

 

“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는 웃었다.

이번엔 제대로.

 

“사실은,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라서요.”

 

그 말이

의외로 조용하게 들렸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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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편의점 앞,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별 말 없이 캔커피를 들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그때, 소개팅 끝나고

문자 보냈잖아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내가 답장 제대로 못 한 거 알아요.

그때는, 그냥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네. 뭐… 괜찮아요.”

 

“괜찮은 척하지 말고.”

 

나는 눈을 내리깔고

그의 말 끝을 기다렸다.

 

“그땐 내가 정리 못 해서 피한 건데,

지금은 좀 정리됐거든요.”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내 얼굴을 잠깐 바라봤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술이 움직이려다 멈추고,

고개가 들릴 듯하다가 다시 내려갔다.

 

조금의 침묵.

그리고 은석이 말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서.”

 

이상하게,

그 말이 참 조용했다.

 

아무도 듣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진심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커피만 한 모금 마셨다.

 

온도는 미지근했고,

심장은 그 반대였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해서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서.

 

어떤 마음인지,

어떤 감정인지,

그가 말한 ‘지금’에 내가 포함된 건지.

 

아무것도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 말 하나로

모든 감정선이 흔들렸다.

 

그가 건너온 거리 위에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