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시작

장난이면 하지마

그날도 은석은

아무렇지 않게 다정했다.

 

스터디 중간,

내가 물을 가지러 일어났을 때

조용히 따라와서 말했다.

 

“오늘 피곤해 보여요.”

“이 문제, 내가 정리해둔 거 있는데 줄까요?”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

 

근데 자꾸 나한테만.

 

다른 조원이 물었다.

 

“근데 진짜 둘이 뭐 있어?

아닌 거 알면서도 좀… 이상해.”

 

나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점점

불쾌해졌다.

 

왜 하필 나야?

 

왜 자꾸 나한테만 이렇게 굴지?

 

왜 말은 안 하면서,

행동으로는 관심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건데.

 

스터디가 끝나고,

은석이 나를 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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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어요?”

“같이 밥 먹을래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은석님.”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내가 먼저 그렇게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만해요.”

 

“뭘요?”

 

“이렇게 말 걸고, 챙기고, 다정하게 굴고.

근데 그 뒤엔 아무 말도 없잖아요.”

 

나는 계속 말했다.

 

“그날 그렇게 말해놓고,

그다음부터 계속 이러는 거…

나 그냥 장난치는 것처럼 느껴져요.”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진짜 장난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말 서툴러서,

그냥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그 순간,

그가 왜 그런 식으로 다가왔는지

왜 나한테만 말 걸고,

왜 나한테만 웃었는지

이제 다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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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못 했다.

 

내 심장은 너무 빠르고,

머리는 너무 느렸다.

 

그날 저녁,

기억나는 건 딱 하나였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진심으로 말했던 그 네 글자.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