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여유롭게

2. 시원한, 그런 향기

제2화

시원한, 그런 향기.

첫날부터 난 찍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선생님과는 이상하게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어?!? 정보람??"

"어?!? 선배??"

"뭐야?? 그 옷차림?"

내 옷차림은 의사 가운이었다.

"너 의사 됐어???"

"네.. ㅎ"

"와.... 대박....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선배."

"크ㅋ 연세대 갔다는 건 들었는데 우리 병원에 올 줄은.... 인마! 연락 좀 하고 살지, 너 대학 들어가고 연락 한 번도 안 한 건 알고 있냐?"

"아.. 그랬나요.... ㅎ 미안해요.. ㅎ"

"아니 뭐... 미안할 것 까진 없고.. ㅋ 암튼! 반갑다! 환영한다 정보람."

"ㅋ네~"

진짜로 성우 선배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레지던트 생활이 이렇게 내가 상상한 것에서 계속 뒤틀리고 있다.

"보람~ 커피 사줄까?"

"네!!"

우린 근무 중이라 멀리는 못 가고 병원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미안, 좋은데 데려가고 싶은데, 그건 담에 하자"

"괜찮아요, ㅎ 대신 꼭 가야 돼요 좋은데."

"ㅋㅋ네네~~"

성우 선배는 내 중, 고등학교 선배이다.

오랜 시간 같은 학교를 다닌 만큼 친한 사이였다.

선배랑 작지만,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하며 옛이야기를 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 나 수술 잡혔다.. 미안, 담에 또 보자 보람~~"

"네ㅎ 얼른 가봐요~"

휴대폰 연락을 확인하고는 웃고 있던 표정을 굳히던 선배가 헐레벌떡 뛰어간다. 그 뒷모습이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잠깐 쉬었지만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일상에서 같이 있는 사람 중에 친한 사람이 있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


내 생활은 항상 그렇듯이 정해진 매뉴얼 대로 흘러갔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해진 대로, 시키는 대로 정확히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때까지 해오던 습관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배운 대로 그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이미 배웠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고, 나에겐 그게 편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를 로봇이라고 하곤 했다.

오늘은 일이 평소보다 조금 빨리 끝났다.

나는 너무 피곤한 탓에 살짝 쉬려고 11층으로 올라갔다.

'어..?'

그 엘리베이터 싸가..... 아니, 강 다니엘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나가야...겠...'

"나 안 자요"

다시 나가려는데 말을 걸어왔다.

"제가 나갈게요. 쉬세요"

"안 잔다니까 ㅋ 잠깐 생각한 거예요"

강 다니엘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 생각 중이었어요. 쉬어요~"

그 남자 아니, 강 다니엘 선생님이 나를 지나쳐 나갔다.

그가 지나쳐가며 일어나는 바람에 조금 시원한, 그런 향기가 났다.

"아, 저기.. 그.. 전에 엘리베이터.. 요..."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그냥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적... 없었는데...

"엘리베이터요? 언제 말씀이신지..."

"아.. 아니에요.. 안녕히 가세요.."

"네"

나만 계속 신경 썼던 것이다.

'이 씨... 끝까지 재수 없어.... 뭐야 기억도 못 하는데 괜히 피했네..;'

나는 아까 강 다니엘 선생님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오늘따라 되게 피곤하네..  잠깐 눈을 감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아주 행복한 꿈.

한 남자랑 내가 예쁜 꽃밭의 가운데에 있었고, 한 남자도 나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행복감을 즐기다가 뒤늦게 꿈이라는 걸 지각했다.

"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10분이 지나 있었다.

'휴... 아직 10분 밖에 안 지났네... 다행이다..'

그러고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나 시선 앞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고, 그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 깜짝아!!"

"아,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 강 다니엘 선생님?! ....."

"아.. ㅎ 아까 뭘 놔두고 가서.."

"아, 그러시구나.. 그, 그래서 차, 찾으셨어요?"

"네ㅎ"

"다, 다행이네요"

강 다니엘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 그리고 강 다니엘 선생님이 뭡니까?ㅋㅋ 그냥 강선생님, 정 선생님,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아... ㅎ네.."

나가다가 잠깐 멈추더니 나에게 그 말을 했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진짜로 간 떨어질 뻔했다. 놔두고 간 게 있어서 찾았으면 가지고 가면 되지.. 왜 거기 앉아있데...?

나는 놀란 심장을 타이르고 나도 방을 나섰다.

"보뢈 보뢈 보뢈~~"

나가다가 성우 선배랑 마주쳤다.

"보람이거든요? 보뢈이 뭐예요.."

"ㅋㅋ재밌잖아~~ 근데 너 잤어??"

"아.. 티 나요?"

"응.. 얼굴에 자국... ㅋㅋ도장 찍혔넼ㅋㅋㅋ"

"아.. 실수였어요!..."

"실수는 무슨, 잘했네!"

"네?"

"잘했다고요.. 좀 쉬면서 하라고요 넌."

"에이, 말을 왜 그렇게 해요? 누가 보면 내가 맨날 밤새는 줄 알겠네.."

"뭐, 비슷하잖아?"

"아, 선배!"

"ㅋ 좀 쉬면서 하라구... 네 건강도 좀 챙기라고!  그래야 남을 살리든가 말든가 하지.."

맞는 말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성우 선배한테 따끔한(?) 충고를 듣고 다시 잠을 깼다.

그리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의사 가운을 고쳐 입고, 병실로.

병실을 들여다보며 아픈 사람들을 볼 때, 좀 나아진 사람들을 볼 때,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의사 가운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 의사 가운이 마치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버텨야 했다. 무겁다고 물러설 수 없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의사니까. 다들 그런 의사를 원하니까.


오늘은 첫 수술이 있는 날, 어제부터 잠을 설쳤다.

너무 긴장이 돼서 오늘 아침에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다.

'하.. 진정하자.. 내가 수술하는 것도 아니고. 어시스트잖아...'

수술복을 입고 수술실 앞에 서니, 긴장도 됐지만 지금 내가 여기 서있는 게 황홀했다. 내가 꿈꾸던 모습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뚫어져라 쳐다보며 많은 것을 눈에 담고, 더 많은 것을 머리에 새기려고 노력했다.

"뭐 합니까, 입구 막고 서서."

"아, 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혼났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에...?  강 다니엘... 선생님 아니, 강선생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얼떨결에 그 유명한 수술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메스"

"네!"

"여기 좀 잡아 봐요"

"네"

"여기 눌러요"

"네"

수술을 하는 내내 강선생님은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숨 한번 크게 쉬지 않고, 수술에만 집중했다.

그리고는 아주 빠른 시간 내에 교통사고 환자 척추에 박혀 중추신경을 자극하던 유리 파편을 꺼냈다.

수술 중 강선생님의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행동 중 하나도 필요 없는 행동이란 없었다. 정말로 내가 책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끝났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수술실에서 사라졌다.

강 선생님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수술하는 동안 나는 마치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마법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난 그 바람이 지나갈 때, 전에 맡아본 시원한, 그런 향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