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낭만주의? -
연준이 기억하는 중학교 3학년의 끝자락, 겨울방학은
온통 눈으로만 가득했다.
저녁사이 쌓인 눈들을 밟으며 어린아이처럼 헤헤 웃으며 뛰어노는것이 연준에게 일상이 되었다.
"눈 이만큼 쌓였어요 형!!"
"눈사람!! 눈오리 만들자 휴닝아!!"
범규와 휴닝이 연준의 눈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활기찬 애들의 모습을 보며 연준이 장난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러다가 진짜 화이트 크리스마스 되겠네요. "
태현이 뽀득뽀득 눈을 밟으며 걸어왔다.
"그러게. 눈 이만큼 쌓여서 커플들 다 파묻혔으면 좋겠다!"
농담을 던진 수빈이 어느새 눈을 모아 범규에게 던졌다.
허허 웃은 범규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수빈을 쫓았다.
"아우..시끄러워. 쟤네는 어째 철이 더 없어지냐."
"형 꽤 재밌어하는 얼굴인데요."
연준은 아빠미소를 짓던 얼굴을 열심히 무표정으로 만들었다.
태현이 웃으며 눈사람을 굴리는 휴닝카이에게 갔다.
좀처럼 굴려지지 않는 눈 때문에 휴닝은 반쯤 포기하고있었다.
"왜 포기해. 다시 굴리자."
태현은 눈에 파묻혀가는 휴닝을 일으켰다.
연준은 그런 태현을 빤히 쳐다봤다.
"그래, 포기하지말고 계속 굴려! "
그러고는 둘에게 소리쳤다.
포기하지말라고. 계속. 웃음지으면서.
○●○
단톡방이 시끄러웠다.
자동적으로 음성인식이 되는걸까.
들리지 않아도 억울함에 소리치는 최범규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듯 했다.
최범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았다며 억울함을
하소연중이었다.
[오랜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슨데!!!!!]
[왜 선물이 없서어!!!]
아이구, 여기서도 시끄럽네.
연준은 폰을 덮고서 창밖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이 휘날렸다.
가히 장관이었다.
캐롤이 울리는 크리스마스에 연준은 혼자였다.
선물도 못받았다는 사실도 조금 허무했다.
심심해.
연준이 폰을 들었다놨다 했다.
지루한 크리스마스였다.
띠링,
알람음이 울렸다.
보나마나 최범규겠지.
연준이 들어나 보자 하며 폰을 들자 발신인은 범규가 아니라
동창이었다.
"놀리려고 전화했어?"
커플자식아.
"에이, 놀지도 못한다야, 여친 친구가 헤어져서 위로중이야.
기다려주고있어"
"여친 친구?"
"그 있잖아, 왜. 아..그 전학왔던 여자애! "
연준이 잠시 숨을 멈췄다.
그 여자애가 다시 머리를 스쳤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크리스마스날에 헤어지셨단다. 여친이 엄청 달래고있어."
"...."
"야, 최연준?"
"..아. 미안."
"정신도 놓고다니네, 아, 끊는다!"
전화가 끊겨도 연준은 여전히 멍해져있었다.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다 잊은 판에 다시 기회를 주는건
무슨 예의인가?
연준의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아, 진짜로. 잊었단말이야.
연준이 다시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때처럼 빨게졌다.
흔들릴거라던 마음이 튀어나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아우우..어떡해.. "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갑작스레 다가온 사실이 연준의 가슴을
다시 박동하게끔 만들었다.
아직 식지 않은 불꽃이 남아있었다.
땅과 가장 가까운곳에서 조금의 빛을 유지하고있었다.

[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
두근거림이 시작된 그날부터, 연준은 다시 갈등했다.
위로는 커녕 기회만 노리는 승냥이꼴이 된것같아 한심해졌다.
결국 다시 접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해가는 연준이었다.
가까스로 얻어낸 그 아이의 전화번호 앞에서 연준은 망설였다,
걸어? 말아?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으면?
갑자기 헤어졌냐 물으면 화내겠지?
어떡하지..?
끊임없는 물음표가 연준의 머리에서 생겨났다.
그때 폰이 울렸다. 하마터면 연준은 폰을 떨굴뻔했다.
"휴닝이..?"
휴닝카이가 자기는 제발 귀엽게 해두라며 직접 저장해둔 귀여운 이모티콘이 붙은 휴닝카이의 이름이 액정에 떠있었다.
"바꿔야겠네. 이름."
연준이 통화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잘 지냈어요 형?"
발랄한 목소리가 마중나왔다.
"형! 형도 선물 못받았죠! "
최범규는 왜있는거야.
"난 안받은 거거든. 휴닝이 왜?"
투덜대는 범규의 목소리 뒤로 휴닝이가 말을 꺼냈다.
"형 고백해봤어요?"
"..엉..?"
뭐지, 연애상담..?
"그 짝사랑 상대한테! 몇달전에 크리스마스였잖아요! "
아, 얘네는 접었던걸 모르는구나.
그게, 하며 연준이 말하려던것을 끊고 범규가,
"형 힘내요! 차이더라도 고백하고 차이는게 낫죠! "
하고 소리쳤다.
"맞아요! 이벤트 필요하면 도와줄까요?"
휴닝이도 거들었다.
귀여운것들.
"됐어. 나 혼자 조용히 할거거든. "
두 사람이 폰 너머에서 투덜댔다,
"형아 바빠. 끊는다! "
연준이 유쾌하게 전화를 끊었다.
조금 시끄러운 동생들이라도 도움이 되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다시 기회가 온 격인데, 한번 겪은 아픔으로 외면하고싶진 않았다.
포기하지 말아보자.
부딫혀보자.
연준이 통화를 연결했다.
어느새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은 가고, 나무는 봄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더라도, 차근차근 준비하는것이 좋을거니까.
혹시 아직 봄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은 너를 위해서
연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사랑도, 이 설렘도 떨림도, 알수 없는 앞길도 내가 짊어질것들.
연준은 다시 사랑을 믿어보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