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하다, 아들아."
저희도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괜찮아요, 전 애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여주는 내가 떠난다는 걸 알까?
"유미가 이미 말했을지도 몰라. 난 모르겠어."
그나저나, 아들아, 너 참 운이 좋구나. 여주를 다시 만날 수 있겠네."

"여주는 아마 날 싫어할 거야."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꺼지라고 하지 않으면 기적일 거야.
"어? 여주가 왜 널 싫어하겠어?"
"그녀는 항상 나를 싫어했어. 그녀를 좋아한 사람은 나뿐이었지."
어쨌든,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부모님께서 갑작스럽게 해외 발령을 받으시는 바람에 한국에 혼자 남게 되었어요. 학교 근처에 작은 방을 빌릴지, 아니면 친척집에 머물지 고민하던 차에 유미 이모께서 흔쾌히 옥상 방을 쓰게 해주셨죠. 전학 가야 할 학교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 어차피 정시 입학시험을 볼 예정이었으니 조기 전형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요. 게다가 5년 만에 김여주를 다시 만날 기회도 놓칠 수 없었죠.
"보고 싶었어."
김여주를 보자마자 그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알던 통통하고 귀여운 여주는 온데간데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여주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날 미워하는 모양이다. 씁쓸하군.
"이게 뭐지?"
"무슨 소리야, 나잖아."
"짐은 왜 가져왔어요? 여기 왜 오셨어요?"
"유미 이모가 말 안 했어? 오늘부터 나 여기, 네 방 위층 옥상방에서 살 거야."
"왜?"
"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자리라 궁금한 점이 많으시겠네요.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되시겠지만, 저는 긴 여정 때문에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여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표정… 5년 전이랑 똑같아 보였다. 완전히 놀랐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놀려주고 싶어진다. 마치 아기 너구리가 볼을 부풀리는 것 같다.
"와, 드디어 내가 소문으로만 듣던 김태형 씨를 볼 수 있는 건가?"
"글쎄… 김태형 얘기가 많이 들린다는 건 무슨 얘기예요?"
"이봐, 너 그 사람 얘기 너무 많이 해서 이제 내가 그 사람을 아는 것 같아. 아직도 그 사람 잊지 못했어? 아무도 만나지 않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옥상방에 사시면 매일 같이 식사하시나요?"
"네, 전 그냥 그 방에서 자요."
"엄마는 왜 이 중요한 일에 대해 나에게 묻지 않았을까…!"
"이봐, 날 놀리려는 거지? 너 아직도 김태형 좋아하지?"
"아니에요! 그 사람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김태형은 이제 그저 추억일 뿐이에요. 어렸을 때였지만, 그를 향한 감정은 너무나 생생해서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그 추억을 조금씩 나누기도 했고, 태형이의 외모가 워낙 뛰어났기에 지난 5년 동안 그를 떠올릴 때마다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죠. 하지만 김태형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저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일 뿐이에요. 5년이나 떨어져 지냈는데도 아직도 그를 좋아할 만큼 미친 사람은 아니에요.
"엄마, 내 교복 어디 있어?"

"좋은 아침이에요?"
"...너 때문에 오늘 아침은 정말 최악이야."
"덕분에 오늘 아침 기분이 좋았어요."
"유니폼은 왜 입었어?"
"이거요? 왜요?"
"왜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거야?"
"저는 이쪽으로 전학 왔어요. 여기가 여기서 제일 가까운 학교였거든요."
"무슨 헛소리야? 지하철로 30분 거리잖아. 바로 옆에 학교도 있는데, 왜 굳이—"

"내 선택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나저나,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예전에는 아주 작았는데, 이제는 거의 나랑 키가 비슷하네."
"꼬마 난쟁이, 너 정말 작아졌구나."
"난 키가 작지 않아. 그런데 넌 날 보고 반갑지 않은 거야?"
"… 설마."

"진심으로, 너를 너무 보고 싶어서 여기로 전학 왔어."
"…"
늘 이랬어. 그때도 김태형이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곤 했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 말 한마디에 얼마나 설레고 기대했는지 떠올리면 예전의 내가 생각나더라. 그리고 지금도,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5년이 지난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려. 너무 답답해.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넌 언제나 내게 너무나 편안한 존재였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당신은 김여주니까요, 당신에게 어려운 건 아무것도 없죠."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어린 시절 짝사랑 이후로 줄곧 당신 곁에 있는 게 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저는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당신에게 저는 그저 손쉬운 존재였을 뿐이에요.
"근데 그렇게 표현하는 건 좀 과하지 않아? 김태형이 너 좋아해?"
"저 녀석은 정말 교활해.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사람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건가요?"
"… 모르겠어. 하지만 그는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내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여전히 흥분한다는 사실이 너무 짜증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