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아, 정말 미안해... "
"괜찮다니까, 친구끼리 힘들면 돕고 사는 거지."
"그나저나 워낙 태형이 성격이 안 좋아서 여주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일단 더우니까 들어와, 여주 땀범벅이다."
해가 쨍쨍하고 뜨거운 여름날_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온 곳은 엄마 친구 수영이 이모집이었다. 엄마 혼자 날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는지 월세도 밀리고 밀려 쫒겨나듯 집에 나와 수영이 이모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들어와서 보니 수영이 이모집은 어마무시하게 컸다. 엄마 말로는 이모부가 대기업을 운영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는데 집을 보아하니 그래보였다. 엄마 속도 모르고 작은 집에서, 돈을 달라는 아주머니의 화난 목소리를 안 들어도 되니 너무 행복했다.

"..나는 10살 김태형이야..."
"어머, 애가 여주 앞이라고 부끄러워하네?"
"..그런 거 아니거든..!!"
첫만남은 생각보다 귀여웠다. 수영 이모가 성격이 안 좋다길래 쌩까고 그럴 줄 알았는데 볼이 조금 달아올라 핑크빛이 도는 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소심한 나에게 가장 친한 첫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_
"야, 서여주. 너가 우리 엄마한테 꼰질렀지?"
"..이모가 괴롭히면 말하라고 해서 말한 거 뿐이야..."
"굴러들어온 주제에, 내가 이 집 주인이야. 내 말 안 들을 거면 나가."
4년 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내가 어리석었고, 창피했다. 첫만남은 이모 앞이여서 그런지 부끄러워했지만, 이모가 사라지자 욕이란 욕은 다했다. 더 좆같은 게 뭐냐면 학교에선 여자애들에게 온갖 착한 척이란 척은 다하면서 나한테만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이것도 4년이나 들으니 익숙해졌긴 하지만 소심한 난 무서움이 가장 컸다.
"야, 엄마한테 얘기 좀 잘 해줘."
"..뭘?"
"쌈박질 한 거 들키면 엄마가 백퍼 아빠한테 얘기한단 말이야."
"그러면 나 용돈도 끊기고 엄청 혼난다고..."
"말해줄 수 있지? 서여주 믿는다."
문에 몸을 기대고 날 아래로 내려보며 얘기했다. 부자집에서 자라서 그런가, 부탁하는 태도는 개나 줘버렸다. 항상 무시하다 지 불리하면 먼저 말 꺼내고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는 게 김태형 특징이었다. 못되게 구는 김태형에게 할 수 있는 복수의 기회는 생각보다 많이 왔지만 복수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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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입학한지 한달이 넘어가는데 같이 먹을 친구 없냐?"
"너가 괜한 말해서 엄마가 점심 같이 먹으라고 하잖아."
"..미안."
"앞으로 엄마 앞에서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
"내가 친구들 놔두고 너랑 점심을 왜 먹냐?"
"불편하게."
초등학교, 고등학교 모두 어쩌다 김태형이랑 같이 다니게 됐다. 그것도 항상 같은 반. 아마 수영 이모가 낯가리는 날 위해서 김태형이랑 붙여달라 했겠지. 낯도 많이 가리고 소심한 나였지만 친구를 금방 사귈 수 있을줄 알았다. 근데도 안 생기는 거 보면, 김태형이 방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김태형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_
"아니, 시발. 나 존나 바쁜데 그 선배가 불러서 뭐라하는 지 아냐?"
" 죠아홰, 태횽아~"
"이 지랄 하는 거 있지?"
"언제 봤다고 좋아한대, 개웃기네."
"..야, 내 말 듣고 있냐?"
"아, 으응... 그래도 그 선배는 진심으로 한 말일텐데.."
"야, 너가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래."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얼굴이랑 집안보고 달려드는 거잖아."
초등학생부터 김태형은 인기가 많았다. 가식적이지만 다정한 성격과 잘생긴 얼굴, 거기에 좋은 집안까지. 김태형을 보면서 짜증남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항상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태형한텐 마냥 좋진 않나보다. 근데 웃긴 건 이래도 여자들한테 잘하고, 고백하는 여자 차지도 않고 받아준다. 나쁜 남자 스탈이랄까?
"..너 서여주 맞지?"
"난 1학년 7반 이도윤."
"나 너 좋아해."
"...응?"
"입학식때부터 쭉 너가 계속 신경쓰였어."
"너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은데, 우리 사귀지 않을래?"
"아.. 그ㄱ,"
"사귀긴 뭘 사귀어, 시발."
"서여주는 너 같은 놈 몰라."
"서여주한테 눈 독 들이지 말고 꺼져."
항상 나에게 못되게 군 김태형이 싫었다. 잘생긴 얼굴 믿고 깝치는 김태형도 싫었고, 가식적이고, 뒤에서 여자 욕하는 김태형도 싫었다. 싫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고 왔는데...
나 아무래도 나쁜 남자를 좋아하나봐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