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출국
떠나기 전날이었다.
"해주야, 내일 출국 몇시야...?
데려다줄게. 짐 많잖아."
방정리를 마치고 자려는 나에게 정국이 방문에 기댄 채 물었다.
"아침인데... 너 정말 시간 괜찮아...?
혹시 무리하는 거면.."
"연차 냈어. 같이 가자"
정국이의 말이 딱딱하게 나의 말을 잘라냈다. 정국이의 모습은 여전히 차가웠다...
휴..
얕은 한숨을 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침에 나가려고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꺼내자 정국이는 말없이 차에 실어주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우리는 차 안에서 말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헤어지게 되는 걸까... 이럴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걸까... 마음이 아파졌다. 팔걸이에 걸려있는 정국이의 손을 예전처럼 다정하게 잡아주고 싶었지만 왠지 용기가 안 났다. 가만히 손가락을 뻗었다가 다시 말아쥐었다.
. . .
공항에서였다. 주차를 하고 짐을 내렸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씩을 나눠 들려고 했는데, 정국이는 내 손에 들려있던 캐리어를 낚아채더니 두 개 다 가지고 가버렸다. 왠지 민망함에 손이 허전했다. 먼저 빠른 걸음으로 걷는 정국이를 쫓아가자니 왠지 정국이가 앞장서고 내가 뒤를 쫓아가는 모양새가 되어서 우스웠다. 출국 게이트까지 정국이는 나보다 앞서 걸을 뿐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럴 거면 뭣 하러 나를 데려다주는 걸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출국장까지 걷는 동안 나는 속상한 마음에 바닥만 보며 걸었다. 그러다가 쿵... 정국이 등에 머리가 부딪쳤다. 정국이가 걷다 말고 서 있었다.
"해주야..."
..?
고개를 들어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해 보이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다.
"이거... 받아"
정국이는 갑자기 나의 손을 잡았다.
"뭔데..."
주머니에서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낸 정국이는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원래 여행 가면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여행은 못 갈 것 같고...
또 이것저것 준비했던 것들도 다 수포가 되긴 했지만,
이건 정리할 수가 없더라...
가지고 있어 줘.."
정국이 어깨 너머로 보이는 막 떠오르는 붉은 태양 빛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부드럽게 반짝였다.
"한동안 쌀쌀맞게 굴어서 미안해...
나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말을 하는 정국이가 왠지 측은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마음을 정리했다니, 그것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했는데,
오늘 아침까지도 정리하려고 애썼는데,
이제 결론이 난 것 같아."
"무슨 결론..?"
"난 역시 너 없이는 안될 것 같아.
니가 옆에 있는 게 이렇게 익숙한데... "
반지를 끼워주느라 붙잡혀있던 손에 정국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 나도 이렇게 너랑 헤어지고 싶진 않아.
"정국아, 나도 너에 대한 마음이 변했거나...
너를 멀리하고 싶은 건 아니야,
나도 너 없이는 안될 것 같은데...
온전히 나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거야...
미안해.. 나 잘 정리하고... 잘하고 돌아올게. 그러니까.."
다시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고마워... 반지 항상 끼고 있을께.."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정국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야 이 아이의 마음이 조금 괜찮을 것 같았다.
정국이는 내가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 티켓을 받는 동안 옆에서 기다려 주었다. 출국 심사장 앞. 정말로 헤어져야 할 때였다. 정말 잠깐 몇 걸음이었지만, 오랜만에 정국이와 손을 잡고 걸었다. 손을 잠깐 잡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내가 이 아이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심사장 앞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보자.. "
포옥... 정국이가 나를 안아줬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훈련 잘 받고 있어. 내가 너 보러 갈께... 알았지..?"
"응...? 정말..?"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너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정리해봐... 내가 널 만나러 가기 전까지.."
"ㅎㅎㅎ 뭐야... 정말..? 그래... 알았어"
정국이가 하는 말이 정말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정국이는 나에게 오겠다고 했다. 그래... 그래도 차가웠던 정국이가 다시 따듯해진 모습에 조금 뭉클했던 것도 같다.
".. 이제 정말 헤어져야겠다... 정국아... 나 갈께..."
"응~ 그래... 건강하게 잘 다녀와"
정국이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정국이의 품을 떠나 출국장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