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히다

외전 (5) 시선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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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시선의 정체


처음에 입국하고 나는 악몽이 시달리며 밤마다 끙끙 앓았다. 사람들에게는 시차 적응 때문에 몸살이 온 것 같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꿈은 말 그대로 휘몰아쳤다. 낭떠러지에 선 것처럼 위태로울 때도 있고, 어떨 땐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했다. 지나친 악몽에 시달리며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국이의 품이 너무 그리웠고,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낮에는 수업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들에 참여하며 즐거운 듯 행동했지만, 진짜 나의 마음속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어느날 주말이었다.주말인데 낮에 좀 졸아도 될까... 

일주일 동안 피곤했던 나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바람이 부는 언덕 위, 짙은 어둠 사이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 언덕 끝은 절벽인 걸까...? 어쩌면 김태형을 마주쳤던 그 절벽 같기도 했다. 저 절벽 끝에 시선이 느껴졌다. 날 지켜보고 있다는 듯 쫓아다니는 시선... 그래 네가 다 앗아갔지, 내 가족을 나의 꿈을... 하지만 나는 이겨냈어. 널 잡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도 다 해냈고, 너 같은 것들을 잡는 일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널 내가 꼭... 잡고야 말겠어..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비바람 속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리고 시선이 있었던 듯한 절벽 끝,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며 손을 뻗자,

......!!!

그대로 꿈에서 절벽 끝으로 떨어져 버렸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해주야, 너 괜찮아...?

 방금 일어나기 전에 소리 질렀던 것 같은데..."



숙소 룸메이트였던 스테피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땀에 흠뻑 젖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파란 눈에 금발 머리를 한 여자애의 얼굴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힘들어 보이는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미안해... 놀랐어...? 방금 악몽을 꿔서... 아마 금방 괜찮아질 꺼야.."


"난 괜찮아, 잠자리가 바뀌면 나쁜 꿈을 꾸는 건 흔한 일이지 뭐... 혹시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알려줘, 내가 도와줄께.."


"고마워, 스테피"




숨을 고르며 잠시 앉아있었다. 필요한 도움이라... 나에게 필요한 건 정국이 품인 걸... 그녀는 호의적으로 말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도움은 그녀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를 도와주려는 스테피의 얼굴이 정국이와 그녀의 모습이 겹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정국이를 사랑한 걸까, 필요로 한 걸까...? 악몽 때문에 그에 대한 나의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스스로가 너무 나약하게 느껴지면서 미웠다.


.    .    .


스테피는 내가 종종 악몽을 꾸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에게 신경 써주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강의실까지 같이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현지인이었던 스테피는 외곽의 특수수사대 소속 수사관이었고, 외국인인 나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행동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이었던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연수 과정에 간단한 체술 수업이 있었는데 원하는 사람들은 더 체육관을 이용할 수 있었고 가끔은 체술 선생님이 체육관에 들려서 코치를 해주시기도 했다. 악몽과 싸우자... 이런 마음으로 나는 운동에 매달렸다.

이 꿈은 내가 새로운 곳에 왔다고 꾸거나, 향수병 같은 것도 아니니까...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몸이 피곤하면 잘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더 매달렸던 것 같다. 피곤하게 운동을 하고 기숙사에 오면 정신없이 잘 수 있었지만, 악몽을 꾸지 않을 만큼 매일 운동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그래서 어떨 땐 잘 때 외현화 한 모습으로 자보기도 했다. 자는 방법이 달라지면 꿈을 안 꾸지 않을까...? 다행히 기숙사는 수인들과 인간이 구분되어서 룸메이트가 정해졌고, 스테피도 바다이구아나 수인이었다. 한가로운 주말 종종 테라스에서 외현화한 모습으로 일광욕하길 좋아하던 스테피는 내가 완전히 외현화하여 오소리의 모습으로 있더라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현화 한 모습으로 자더라도 악몽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아우 젠장..."



자다가 악몽에 깜짝 놀라 허우적거리면서 메트리스를 찢어놓은 후, 나는 외현화해서 자는 것도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해외로 나온 지 한 달 만에 상담샘에게 연락을 했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잠들기만 하면 악몽이 찾아와요... 선생님은 예전에 제가 김태형을 찾아갔을 때 그러셨죠? 저에게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냈다고, 이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 까요...?"


"에고.. 해주씨.. 많이 힘든 상태인가 봐요... 솔직히 갑자기 떠난다고 했을 때 너무 과감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죠"



할아버지 상담샘이 얕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꿈은 해주씨 마음이 만들어내는 거에요.. 해주씨 마음속에 있는 갈등이 악몽으로 나타나는 거죠.... 해주씨 마음속의 갈등이 뭔지 생각해봐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오히려 악몽이 자꾸 나타나는 지금이 꿈의 내용을 살펴볼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인 면들을 살펴봅시다."


"꿈을 살펴본다고요?"


"꿈을 만들어내는 무의식도 원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해주 씨가 인정하지 못하던 어떤 욕구들... 그런 것들이 무의식에 가라앉는 다고 했잖아요... 그런 인정할 수 없는 욕구들이 해주씨 마음속에는 엄청난 갈등을 만들어냈을 거에요... 그리고 그것들이 악몽으로 표현 되는 거죠... "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인정할 수 없어서 무의식에 가라앉기까지 한 마음들이 지금 바로 생각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너무 걱정 말고 천천히 천천히 찾아보아요. 

꿈일기를 써보면 어떨까요...?"



나는 할아버지 샘의 말에 약간 화가 났다. 천천히 찾아보라니, 나는 마음이 급한데... 

괜히 연락한 건가... 상담샘과의 대화를 떠올리니 오히려 숙제가 늘어난 것 같아서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    .    .


며칠 뒤 찢어진 메트리스를 바꾸던 날, 나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그래 일단 꿈일기라도 써보자... 일단 언제부터 꿈을 더 자주 꾸기 시작했지...?

아무래도 내가 악몽 때문에 본격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생각난 것이 있었다. 노트를 펼쳐놓고 이것저것 끄적여보기 시작했다.



악몽을 자주 꾸기 시작한 시점... 

그 때는 김태형이 체포된 직후였다.



병원에 입원했던 무렵부터... 악몽을 꾸고 나면 불안함에 나는 정국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내 마음속의 갈등이 뭘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꿈 속의 시선에 나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의 실체를 확인해야겠다.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 

정말로 이 꿈이 내 내면의 갈등에 의한 것이라면, 시선이 느껴지는 그 실체 안에 나의 갈등을 만들어낸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나는 꿈에서 시선이 느껴질 때면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다보면 바닥이 사라지면서 떨어지거나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몸이 붕 떠오르면서 쉽게 잡히진 않았다.

꿈도 이런 나의 변화에 반응하면서, 시선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형태가 없던 시선은 점차 검은 그림자 같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다가 점차 검고 끈적끈적한 뭔가로 바뀌었다.

저 안에 있는 것은 날 괴롭게 했던 진짜 김태형은 아니다. 내 안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꿈을 꿀 때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조심스럽게 가보기도 하고 몸을 던져 덮쳐보기도 했다. 잡기 직전 순식간에 잠을 깨는 날도 있었지만, 더이상 비명을 지르거나 놀라지 않았다. 나는 꾸준히 일기로 꿈의 변화를 기록했다.

한달 쯤 지났을까... 이젠 잡기 직전에 몸이 날아오르거나 땅이 꺼지지 않았고, 장소도 내가 살던 집이나, 연구실 등 내가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꿈에서도 평상시처럼 행동하던 내가 그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그것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서 나는 짐을 싸고 있었다. 떠나려던 날 같았다. 거실 한 쪽에 검은 존재가 서 있었다. 하던 것을 내려두고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검은 존재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검은 존재는 등에 벽이 닿자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자리에 서있었다. 검은 진액같이 바뀌어있던 그 물체 속에 손을 넣자 실체에 손이 닿았다. 온 힘을 다해, 그 실체를 끄집어내기 위해 손에 힘을 쥐었다.

미끌거리는 와중에도 꽉잡고 놓지 않았다. 미끄덩거리긴 했지만 손목 같은 것이 잡혔다. 


좌아아악... 

검은 진액을 가르고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전정국....?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정국이가 그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