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이제이
"민윤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내 앞에 서 있던 남자, 윤기를 질책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실수였어"
그는 내게 사과하는 눈치였다. 아까까지 느껴지던 위압감이 무색하게 남자의 말 한 마디에 조금 기가 죽은 듯한 모습. 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남자는 그걸 보더니 곧 윤기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내게 다가왔다.
"실례했습니다"
"......"
"저는 김석진입니다. 이곳의 의무관이라고나 할까요"
인사를 건네는 석진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의 눈에도 미묘하게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설명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석진이 윤기를 흘겨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는 그의 시선을 본체만체하며 머리를 쓸어넘길 뿐이었다.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여긴 마족의 영역입니다"
"......"
"여기로 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리 선명하진 않아요"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마족인 것, 내가 마족의 영역에 떨어진 것. 혼란스러운 사실투성이였다. 날개를 잃은 후의 기억은 정말 흐릿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되살아나는 살이 에는 고통에 진작 미쳐버렸을 테니까.
"우리가 쓰러져 있는 널 여기로 데려온 거야"
치료도 이 녀석이 했고. 윤기는 길어질 듯한 설명을 간단명료하게 마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도 온 몸을 떨리게 하는 감각이 눈을 뜬 후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마족은 파괴를 위한 능력을 타고난다고 했는데.
"희귀한 경우긴 하죠"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거고요. 내 의문을 안다는 듯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라면"
"마왕성입니다"
"...그럼 당신들이"
"아, 아니야. 그렇게는 부르지 마"
그런 호칭은 됐어. 질색하며 표정을 찌푸리는 윤기를 순간 경직된 얼굴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이유로 멸시당했지만 천족의 터전에서 자란 이상 내게도 마족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마계, 마족, 거기다 마왕이라니.
"뭐야, 그 얼굴은"
"......"
"갑자기 겁이라도 나?"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던 사실이다. 전혀 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까지의 호의들을 마냥 잊은 건 아니었다. 내게는 이들이 신족들이 매일같이 떠들고 다니는 절대선에 오히려 더 가까워 보이기까지 했다. 모순된 정의로 내 날개를 도려낸 족속들보다, 더욱.
"당분간 여기서 지내"
"......"
"...갈 곳이 생길 때까지"
금새 태연해지는 얼굴을 바라보다 윤기가 입을 열었다. 나는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이곳에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느꼈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계속되니 이젠 존재의 이유조차도 선뜻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뭘까요?"
"......"
"나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데"
처음부터 가진 건 무엇도 없었는데. 보통들 사이에 낀 불청객이었는데. 나같은 건 언제 없어져도 상관없는, 다들 빨리 없어지길 바라기만 하는 그런 존재였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양되었고, 그동안 눌러담고 있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새삼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팠다. 목적 없는 하소연을 윤기는 가만히 듣고 있었고, 석진은 내 눈물을 보자 안절부절 못했다.
"난 아무 가치도 없나 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았어요"
"온 세상이 그 녀석들뿐인 것처럼 말하지 마"
"...그들처럼 되고 싶었어요"
"당신은 아무 잘못 없어요. 그들의 오만이 그런 잔인함을 낳은 겁니다"
"......"
"이겨내. 더 대단해져서 그 녀석들이 나중에 너한테 빌빌 기게 만들라고. 그냥 밟아버려"
"......풋"
윤기의 어설픈 위로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런 점은 정말 마족답네. 이상했다. 석진과 윤기가 번갈아 가며 건넨 위로 몇 마디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괴롭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옅어져 갔다.
"도울게"
"......"
나는 미소지었다.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처음으로 의지할 존재가 생겼다. 이 낯선 행복감이 오래도록 남길 바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