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도로를 달려도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드디어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 운전대를 잡은 민규가 조수석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봄도 아닌데 제법 봄 흉내를 내는 바람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원우는 바람을 느끼다 문득 생각이 들어 얘기했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그냥 어디든."
"어디든? 목적지를 정해놓지 말자. 뭐 이런 건가?"
"맞아. 그거야."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그냥 보이는 도로따라 목적지 없이 달렸다. 그러다가 배고파지면 휴게소를 들렸다가 바다가 보이면 바다 구경도 했다가 너무 피곤하면 숙소를 잡아 하룻밤 잠을 편히 청하기도 했다. 목적지 없이 달려도 갈 길이 보여서 불안함은 없었다. 언젠간 이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분명히 머물 생각이 드는 목적지가 있을 거라고.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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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저 지하 냄새에서 벗어난지도 1년이 되었다. 이 정도면 꽤나 지상의 공기를 누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저 밑바닥에서 벗어났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망각에 익숙한 세상 사람들은 잭 나이프를 들었던 원우를 잊어갔다. 여전히 제가 누비고 다녔던 지하와 어둡던 세상은 원우를 기억한다고 해도 굳이 원우를 찾아오진 않았다. 제 아무리 쉬었다고 해도 원우의 실력을 알던 사람은 덤비려고 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원우는 민규와 평화롭게 살고 있다. 예전 둘이 함께 집에서 살았던 것처럼 하루의 시작을 같이 하고 하루의 끝에 건배를 외치기도 하며 소소한 행복들로 하루를 채웠다. 이전에는 밖에서 돌아다니고 오면 웃지도 않았던 원우가 이제는 곧잘 웃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민규도 같이 미소 지었다.
오늘도 다름이 없었다. 평화로운 아침이 원우와 민규를 반겼다. 민규가 일어나 창문을 열면 원우가 들어오는 바람에 추워서는 이불을 끌어 안았다. 그럼 민규가 원우를 흔들며 형 얼른 일어나. 출근해야지. 라며 원우를 깨웠다. 그럼 원우가 눈을 비비적거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일어났다.
민규가 정성껏 차려놓은 이 식탁을 본지는 3개월 정도 됐다. 어렵사리 구한 일 덕분에 밥도 먹지 않고 출근하는 원우를 보던 민규는 원우보다 일찍 일어나서는 아침밥을 준비했다. 덕분에 일찍 일어나서 민규가 정성껏 차린 식탁을 싹 비워야 됐다. 오늘도 씻고 나온 원우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원우가 밥을 먹기 시작해야 안도의 미소가 나오는 민규. 하지만 오전 5시에 기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원우 맞은편에 앉아있던 민규가 하품하자 원우가 풉 하고 웃었다.
"민규야. 피곤하면 더 자지 그랬어."
"내가 자고 있을 땐 밥도 안 먹는 사람이."
"지금 피곤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나 없어도 잘 먹었으면 좀 좋아?"
민규가 투덜대자 원우가 젓가락을 내려두고 민규를 쓰다듬었다. 당황한 민규의 귀가 붉게 물들자 원우가 피식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나름의 고마움의 표시였겠지. 잠 많은 녀석이 잠을 이겨내며 저를 위해 아침밥을 차려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하며 끼니를 거르는 걸 들킨 후로는 단 한 번도 늦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만큼 민규가 원우를 아낀다는 거겠지.
그런 마음을 원우도 모르지 않았다. 이제는 민규가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챙겨야 될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어리광이랄까. 어릴 때는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을 민규에게 부리고 있었다. 여전히 자고 일어나면 식탁에 따뜻한 밥이 올라오는 걸 보고 싶으니까 더 그런 것이다.
아침을 다 먹은 원우가 현관문 앞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신발을 신고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민규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형 잠깐만!"
"어?"
"오늘은 일찍 들어와야 돼 알겠지?"
"오늘? 무슨 날인가?"
"알겠지? 일찍 들어와!"
그리고는 직접 문을 열어 원우를 배웅해 주는 민규. 민규에게 밀려서 강제로 출근을 시작한 원우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더라... 원우는 출근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민규 생일도 아니고 제 생일은 더더욱 아니다. 뭐 특별한 날이라도 있나 싶어도 자신에게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에 불과했다. 그렇게 의문만을 남기고 원우는 출근을 완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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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도 말하지 않고 일찍 들어오라던 민규는 어디 갔는지. 밖에서 보던 집에는 사람이 들어왔다고는 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걸 보면 퇴근은 한 것 같은데. 잠깐 외출이라도 했나 금방 들어오겠지 싶어 원우는 집으로 들어갔다.
띠, 띠, 띠, 띡, 띠리릭!
컴컴한 집안에 불을 키려고 했더니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까 밖에서 볼 때는 저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 이 녀석이 준비한 거구나 키는 엄청 커서는 얼굴도 잘생긴 녀석이 귀여운 짓을 하는구나. 원우는 자리에서 방에서 나오는 민규를 바라보았다.
민규는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원우 형 빨리 소원! 이라면서 케이크를 원우에게 들이밀었다. 원우는 불 붙은 초를 바라보았다. 일단 장단이나 맞춰줄까 하면서 두 눈을 감았다. 무슨 소원을 빌까. 세상의 평화를 바라기에는 제가 살던 어둡던 세계가 쉽사리 없어지진 않을 것 같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는 소원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떤 소원이 좋을까. 원우는 두 눈을 떴다. 그리고는 초에 붙은 불을 후- 하고 껐다. 민규가 집에 다시 불을 켜두고는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원우는 여전히 의문 투성이었다. 생일도 아니고 케이크는 왜 분 건지. 그것도 그렇고 초는 왜 하나뿐인지 민규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 생일 맞는데?"
"나 생일 7월 17일인데?"
"말고 형이 조직으로부터 해방되고 딱 1년이 지났어."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
"꽤나 기념적인 날 아닌가?"
"...그렇네."
원우는 웃었다. 이런 걸 챙기는 사람이 우리 말고 누가 있을까 얘기를 나누며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허...야 민규야 이거 너무 맛있다. 라며 눈이 커진 원우를 보니 민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과거 얘기를 안주 삼아서 술도 한 잔 했다. 그땐 그랬지. 딱 이런 분위기였다.
실컷 분위기에 젖어들어서는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에도 없다. 눈을 떴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침 주말이니까 민규를 깨우지 않기로 했다. 간만에 오후에 해가 저들의 눈을 강하게 비추기 전까지 조금만 더 누워서 자기로. 원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반복할 것이다. 편하게 눈을 뜨고 감기를. 이것이 자유라는 것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는 매번 비슷한 하루를 보내더라도 특별할 것이다. 지금 느끼는 모든 것은 처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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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야. 고맙다."
"갑자기 뭐가 고마운데?"
"날 끝내줬잖아."
"그렇네 형의 어둡던 과거를 끝냈구나 내가."
"물론 정확히는 정한이 형이지만."
"쳇."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덕분에 앞 일이 걱정되지 않아. 고맙다."
"앞으로 고마워 할 일이 더 많을 거야. 그러니까 계속 함께 하자."
"꼭 그러자 민규야. 우리는 밑바닥을 기어다녔으니까 어디든 잘 다닐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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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씁쓸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