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소년

맑음소년 4

photo 맑음소년  



  07.


주변에서 악바리라고 불리는 놈들이 있다. 뭘 하든 끝을 보는 놈들. 게임 하나를 해도 보스몹까지 못 깨면 잠을 못 자는 놈들. 근데 막상 까고 보면 집착하는 게 존나 사소하다. 시험 백점 맞아서 전교 1등하는 거에 목숨 거는 게 아니라, 스티커 떼면 남아있는 자국 없애는 거에 목숨 건다. 끈적거리는 거 어떻게든 없애고 말겠다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또다른 예시를 들어볼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돌연 숨을 참고 어디까지 버티나 실험해보고, 보도블럭 노란색만 밟으면서 걸어다니고, 사소한 내기에 죽어라 달려드는 그런 것들. 난 악바리였다. 공부 쪽 악바리가 아닌 게 아쉽지만 어쨌든 그랬다.




어렸을 때 껌 사면 주는 스티커 다 모으겠다고 용돈을 탈탈 털었다. 그런데도 돈이 모잘라 집에 있는 돼지 저금통까지 깼다. 배가 갈라진 돼지 저금통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스티커는 다 모았지만 그날 저녁 엄마한테 먼지나게 맞았다. 나이가 몇 살인데 스티커 모으고 앉아있냐고. 등짝이 얼얼하게 맞으면서도 손에 쥔 스티커는 절대 놓지 않았다. 이걸 내가 어떻게 모은건데. 그렇게 모았던 스티커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후회가 되진 않는다. 맞을 걸 알면서도 돼지 저금통을 갈랐으니까. 




그런거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굳이 도전해보고 싶은 심리. 윤아름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이런 축이었다. 거절 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다가가고 싶었다. 윤아름은 악바리 근성을 제대로 건드렸다. 끈적거리는 스티커 자국을 한 시간 내내 박박 지우던 내 본성을. 껌 안에 들어있는 스티커를 모으겠다고 가차없이 돼지 저금통을 가르던 내 열정을.




추가해 말하자면 난 이상주의자다. 사람한테 호되게 당했지만 사람을 마냥 믿는 구석이 있었다. 윤리와 사상을 배우면 나오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난 성선설에 한 표를 던졌다. 사람은 착하지. 분명 착해. 환경이 나쁘게 만들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살면 세상이 조금 아름다워보였다. 나름의 방어 기제이기도 했다. 사람이 애초부터 악하다고 생각하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더 비참해졌으니까. 꼬인 마음에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꼴보기 싫어서, 내가 망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다고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왕 사는 거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래서 난 성선설을 믿었다. 사람들은 모두 착한데 그냥 내가 조금 재수없던 거라고 생각했다. 하필 재수없게 내가 걸린 거라고 여겼다. 윤아름을 보는 시선도 그랬다. 분명 착한 애지만 가진 상처 때문에 가시를 치는 거라고. 원래 둥근 애지만 상처 받기 싫어서 모나게 구는 거라고.




윤아름과 처음 만난 후 일주일만에 소문이 퍼졌다. 윤아름은 최범규 깔이다. 요즘 시대에 깔이 뭐냐. 친구들한테 핀잔 아닌 핀잔을 했지만 열기는 식지 않았다. 최범규가 윤아름한테 첫눈에 반했다더라. 윤아름은 최범규한테 눈길 한번을 안 주더라. 사실은 둘이 사귀고 있다더라. 비밀연애 들킬까봐 윤아름이 튕기는 거라더라. 사실과 거짓이 오묘하게 섞인 말들이 나돌았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몰라 그냥 뒀다. 어차피 말은 내가 말한다고 바로 잡아지지 않았다. 저렇게 실컷 떠들다가 재미없어지면 조용해질걸 알았다. 한번 겪어본 일이었고 휘말릴 이유가 없었다. 신경 쓰이는건 윤아름이 불편해한다는 것 정도. 친구들이 윤아름한테 짓궂게 굴때마다 웃는 낯으로 눈치를 줬다. 




앵간히 해라. 애 불편해하잖아. 그러면 또 윤아름 편을 들어준다는 둥 사랑에 미쳤다는 둥 시끄러워졌지만 적어도 윤아름한테 꽂힌 시선들은 나에게로 향했다. 그래. 나 많이 봐라. 익숙하니까. 윤아름은 언제나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불편하다는 듯이 입술 한 쪽을 깨물고선.




2주 반 정도가 지나자 소문이 잦아들었다. 다들 흥미가 떨어진 거였다. 한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으니 다른 소문을 찾아 헤맸다. 내가 윤아름 반에 찾아가 무작정 말을 걸어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았다. 나를 신경 쓰는 건 윤아름 하나였다. 내 말에 반응을 일체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서 티가 났다. 이 새끼 대체 뭐지. 말을 하지 않는데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게 꼭 심통난 다람쥐 같아서 난 좀 웃겼다. 대답을 해주지 않아도 반응이 없어도 윤아름 옆에 있는 게 좋았다. 담담한 얼굴로 샤프를 꽉 쥔 모습이 귀여웠다. 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얘는 성악설을 믿으려나. 가끔은 책상에 엎드려 멀뚱히 바라봤다. 그때도 지금도 눈은 참 예쁘네. 끝에는 항상 눈이 예쁘다는 생각이 걸렸다. 저 눈으로 웃으면 어떤 모습일까. 예쁠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웃었으면 좋겠다. 그런 낯간지러운 생각도 종종 들었다. 




윤아름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건 3주만이었다. 아무런 말과 반응을 보여주지 않아도 끄덕없는 나에게 윤아름은 백기를 들었다. 선배. 여느 때와 같이 윤아름 옆에 앉아 말을 하던 나에게 말했다. 선배라고. 고작 단어 하나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어? 엎드려있던 몸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윤아를의 시선이 처음으로 내게 온전하게 꽂혔다.




"도대체 왜 이러세요?"


"어?"


"왜 자꾸 따라다니고 귀찮게 구냐구요.”


"....."


"계속 싫다고 티냈는데 모르는 것 같아서요."


"....."


"이제 그만하세요."




처음으로 윤아름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듣게 된건 좋았는데 딱히 웃을 만한 내용은 아니라. 말을 끝낸 윤아름은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완곡한 거절도 아닌 강경한 거절. 여기서 붙잡으면 진짜 찌질하겠지. 이런 진상이 없을거야. 알았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근데, 그래도...




"난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


"너랑 친해져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 윤아름을 놓치는 것보단 찌질한게 낫지. 찰나의 순간에 그런 판단이 들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솔직하게 부딪혀야지. 윤아름은 뜻밖의 대답에 약간 얼이 빠져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선배를 왜요?"


"....."


"선배랑 있으면 저한테 뭐가 좋다고."


"....."


"친해질 이유도 없고 유일해질 이유는 더더욱 없어요. 이게 대답이에요.”


"이유가 있다면?"


"....."


"그럼 오빠랑 친해져볼래?"




윤아름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난 계속 말을 이었다.




"너가 원하는 거 해줄 수 있는데."


"제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요?"


"알아. 아주 잘."


"...제 소원은 남들이랑 달라요."


"....."


"선배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전혀 아니구요."


"....."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때마침 종이 울렸다. 윤아름은 필통과 교과서를 챙긴 후 교실을 나갔다. 난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진짠데. 진짜 소원 들어줄 수 있는데. 건네지 못한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언젠간 전해줘야지. 비를 멈출 수 있다고. 너가 울면서 비를 멈춰달라고 빌었던 날 난 이미 널 한번 구했다고. 그러니까 날 너무 싫어하지 말라고.




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비를 멈춰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