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불은 돌돌 만 채로 발만 배꼼 내밀어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진세을. 그녀의 발 밑으로 간간히 마시다 만 맥주 캔 몇개가 나뒹둘었다. 반복적으로 진동이 몇번 울리자 막 잠이 깬 세을이 눈가를 닦으며 탁자 위 핸드폰을 집어들어 신호음을 끊어냈다. 세을은 다 풀리지 않은 피곤함이 급기야 밀려오는지 스피커로 전환하고 엎어지듯 침대에 누웠다.
“ 야 이 지지배야! 뭐 이렇게 전화를 안받아. 내가 지금 몇통째 한 줄은 알아? ”
“ 아 귀청 떨어져. 작게 말해도 다 들리거든? 하여간 신해리 목청 큰거 누가 몰라. 간만에 휴가라 늦장부리는 바람에 못 받았네요, 미안해. ”
“ .. 뭐? 이사님한테서 연락 못 받았어? 너 오늘해외 출장이잖아. 아무리 갑자기 바꿨데도 그렇지, 당장 오늘 오후에 출국해야하는 애가 무슨 여유 - , ”
미친. 세을은 입을 틀어막으면서 놀라고 이것저것 짐을 챙기기 시작하자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건 정말 고마운 해리의 잔소리였다. 건성짓게 들으면서 짐을 싸다가 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둥 나없으면 어쩔뻔 했냐는 둥 매번 같은 래퍼토리로 이어가려하자 나중에 연락한다면서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집어넣자 별볼일 없는 거 뭐 집어넣었다고 캐리어는 금새 차버렸다. 짐을 낱개 꺼내고 지퍼를 잠그려는데,
이런 씹. 무심하게 툭하고 빠져나오는 지퍼에 건성 좌절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일단 급한 터인지라 방 어딘가 있던 다른 캐리어 하나를 집어들고와 가득 쌓인 먼지를 지우기 시작했다. 짐칸을 열자 훅 낯선 냄새가 갇혀있던 찬공기와 함께 손끝에 잠시 머무렀다. 안에 있는 짐을 빼 전부 옮기고 앞주머니를 열자 보이는 필름 카메라도 정리하려는데 손아귀에 엇나간 사진첩이 바닥으로 흩어져버렸다.

“ .. 아, 이게 아직 남아 있었구나. 그때 다 버린 줄 알았는데. ”
세을이 탄식을 내뱉으며 입술을 꾹 다물자 그새 피가 고여 비린 쇳맛이 났다. 사진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고 짐을 옮겨 담았다. 화장후에 옷매무새도 좀 가다듬고 나설 준비를했다. 키링이 메달린 차키를 챙겨 주차장에 들어섰다. 앞서 버튼을 누르자 작은 클락션 소리와 함께 빛이 깜박였다. 1시 48분, 느긋이 가도 시간내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며 여유로운 미소를 띄고 운전대를 잡았다. 벨트를 멘 뒤 시동을 걸고, 시계를 확인하고 달려 주차장을 벗어났다.
신정 사거리에서 우회전, 돌아 앞지르자마자 걸리는 신호등에 혀를 내차고 라디오 불륨을 높였다. 치지..직 , 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날씨가 말썽입니다. 어제보다 쌀쌀한 날씨로 보다 옷 단단히 챙겨입으시고요, 출근길 안개 조심하시길 바 .. 뚝. 세을이 선명하게 건너들리는 기상 정보가 다 끝나기 전에 주파수를 끊었다. 밝아진 화면과 함께 진동이 들여오자 어깨에 얹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너 오늘 출국한다면서. 나한테 말한마디 안하고 가기있기야? 콘서트 마치고 너랑 술 마실 생각에 신나게 귀국하는 길인데 글쎄 니소식을 그 시끄러운 신해리 통해서 들어야겠냐. 하여간 정없어 진세을! ”
“ 태형아, 이 누나가 좀 바빴으면 그랬겠니. 그리고 너도 전과 있다는거 기억해줄래? 그때 말도없이 해외로 간게 누군 .. "
“ 아아! 아무것도 안들려. 누나는 무슨. 그리고 그게 벌써 몇 달전인데 아직까지 우려먹냐? 못돼먹었어. 아무튼 너 각오해라, 돌아오는날 진탕 놀아줘야 해. ”
돌아오는 날엔 각오해야한다는 말과 함께 잔뜩 으름을 놓는 태형에게 연예인이라는 놈이 백날천날 술만 처먹어선 되겠느냐고 언질을 주었다. 그러자 뽀로통해져서는 새침한 척 하는 말이 그렇게 많이 안먹는다는 구차한 변명~. 시덥잖은 대화가 몇번 머물더니 웃어넘기고선 전화를 마무리지었다.
“ 으, 추워라. 좀 껴입고 올 걸 그랬나.”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린 바람이 전체를 흝고 지나가는 바람에 몸소 추운날씨가 느껴졌다. 스커트 밑으로 치렁치렁한 거적담요를 두르고 작은 캐리어를 챙겨 공항 입구로 향했다.
명백한 갑질 연﹏애
런던행 비행기가 지금 이륙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좌석 아래에 안전 구조 장치가 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런던행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습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라며 ..
안내방송이 떨어지자 곧 이륙하기 시작했다. 전날 무리해서 야근했더니 피곤했던 탓일까. 그래도 회사측에서 양심은 있는지 비즈니스 석으로 조율해준 만큼 몇 분 안돼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눈을 떴을땐 반 쯤 온 거리였다. 바로 앞에 진열된 몇 안되는 잡지를 읽다가 창가를 구경했다. 톡톡,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상대를 마주보려는데.

“ 저기,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
“ 아, 네. 감사해 .. 전정국?"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을 눈앞에 마주했다. 이런, 몇년만에 재회가 이런식일 줄은 몰랐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