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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 마른 흰 장미는 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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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흰 장미는 잊을게요 ,

코끝에 시린 바람이 뭍어나왔다. 서걱서럭, 주어진 틈새로 새나오는 잉크가 엽서 한 장 위에 곧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만년필 끝을 뒤따랐다. | 유달리 추운 가을이네요. 올해는 좀 별나게도 가을 비가 많이 내려요. 여름 장마는 그저 지나가는구나 했는데 어째 먹구름이 가을로 밀려들었나보더군요. 비도 바람이며 좀처럼 잎은 수북히 떨어지는데 이곳 앞 마당 단풍은 물든채로 가지를 붙들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답니다. 

한참을 쓰다가 세게 긋어도 어쩐지 나오지 않는 잉크에 달칵, 새것을 갈아챈다면 그소리가 귀에 익는듯했다. 그러다 시렵게 횡하니 부는 바람에 창문을 걷으면 그 끝 어딘가 걸쇠가 닿아 탁하니 정갈한 소리로 닫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솨아 하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 반갑지않게 수시로 들락거리는 가을비에 언젠가 치워야할 것들 앞마당 담 옆으로 놓여진 잡동사니들과 사이 무성히 자라난 잡풀들을 둘러보고는 작게 탄식을 내쉬며 돌아섰다. 이번 비는 언제 또 그칠까 하고서는. 채 아직 마르지 못한 엽서를 책사이에 꽃아두었던 마른 흰 장미와 함께 널려두었다.


“ 하는 수없이 비가 완전히 그치면 그때 보내야겠네.”

“ 응? 뭐를 말인데. ”

“ 있어, 연신 얼마나 보채던지 당신이 먼저 떠난것도 인지를 못하더내.  ”


애당초 먼저 몸을 돌린 당신에게 정을 나누어주는게 왜 아깝지 않은지는 이연에게도 실로 의문이었다. 문득 창을 돌아보니 비는 멎어 있었다. 자리를 떠 창틈 주위 탁자에 올려두었던 엽서와 마른 장미를 살작이 들러왔다. 편지봉투는 흰색 바탕에, 오른쪽 밑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문양이 눈에 띄게 검은색으로 새겨져있었다. 엽서를 고이 집어넣고 밀랍을 녹여 마른 흰 장미 꽃잎을 몇개 떼어내 올려둔채로 인장으로 눌러 엮었다.


“ 점심 먹을래? ”

“ 좋아. 대망의 메뉴는요? ”

“ 푸흡 그게뭐야. 계란말이랑.. 음 그리고 또, 숙주나물! ”

“ 한껏 보잘것 있네. 요즘 너무 계란 말이만 먹는거 아니야? ”


이연이 그에게 한동안 계란말이가 밥상에 올라오는 일이 많았다며 반찬 투정겸 핀잔을 주자 정국은 입꼬리를 살짝 당겨 소리없이 웃더니 요즘 계란말이 달인이 되기 위해서 연습 중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얼씨구. 이미 경지에 오르셨는데요라며 놀리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웃어보이는 이연이었다.

“ 민이연! 그래서 점심은 먹을거지? ”

“ 이렇게나 정성들였는데 안먹을 순 없지. ”

잡곡밥을 가득 담은 숟가락이위에 계란말이를 반만  젓가락으로 갈라얹어 한입에 넣으려다가 너무 커서 밥을 덜어내니 옆에 있던 정국이 젓가락으로 나물을 다시 얹어주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올려 그를 올려다보니 정국은 눈매에 웃음기를 가득 담은채로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붉어진 고개를 푹 숙여 넘어가지도 않는 밥만 묵묵히 넘겼다.

그날 오후. 우체국 옆에 놓여진 빨간 우체통 안에 편지를 흘러 넣었다. POST. 흰 페인트칠이 벗겨져 P와 S만 남은채로 어중간한 글자가 그려져있었다.
아무튼, 편지는 잘 전달 되겠지.



P와 S. 내가 목적지를 적었던가. 어쩌면 고의였을지도. 당신을 잊기위한 발버둥이예요. 당신이 한아름 들고왔던 그날의 흰장미는 이미 바싹 말랐거든요. 마른 흰장미는 이제 잊을게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