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첫사랑
5)

티끌모아태사니
2025.10.23조회수 2
태산이를 향한 나의 외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가 외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태산이로 가득 차 있어서,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금세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척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힘들었다. 그렇게 혼자만 끙끙 앓던 어느 방과 후, 나는 혼자 야간 자율 학습실에서 수학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었다. 며칠째 태산이를 피하느라 질문조차 못 해서 진도가 너무 밀린 상태였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문제, 풀이 방식이 좀 복잡해 보여서 왔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태산이가 서 있었다. 나는 또 예전처럼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회피했다. "…태산아, 여긴 어떻게?" 그는 내 어색한 질문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리곤 내 문제집을 펼쳐들었다. "전에 물어보고 싶어 했던 문제잖아. 기억하고 있었어."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괜히 삐딱하게 말해버렸다. "예진이한테 알려주는 게 더 빠를 텐데. 걔 똑똑하잖아."
내 입에서 예진이의 이름이 나오자, 태산이의 표정이 순간 묘하게 변했다. "예진이? 아, 자료 정리 도와준 친구 말하는 거야?" 그가 물었다. 자료 정리? 나는 어리둥절해서 태산이를 바라봤다. "너희... 같이 있었잖아." 그제야 태산이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과학 동아리 발표 자료 만들고 있었어. 예진이가 파워포인트를 잘 다뤄서 도와달라고 했지. 내가 보기엔 너보다도 똑똑한 것 같던데, 혹시 지아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혼자 예진이와 태산이를 둘러싼 상황을 오해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괜히 혼자 멀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그냥… 너희가 친해 보여서…." 우물쭈물하는 내 말에 태산이는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해 보여서? 그럼 네가 더 친하게 지내면 되잖아. 난 다른 사람한텐 안 이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그 순간, 태산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내가 간절히 원하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너, 내가 수학 문제 알려줄 때 빼고는 잘 안 웃는 거 알아?" 그가 작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텐 샌드위치도 안 줘. 짝꿍한테만 그랬지." 그의 말에 나의 두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나의 모든 오해를 씻어내주는 그의 말이 너무 달콤하게 들렸다. 그동안 애써 감춰왔던 내 마음을, 태산이가 이렇게 사소한 말들로 알아채고 있었다니.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밤늦은 학습실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창밖으로는 이미 깜깜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눈빛이 나의 모든 불안과 걱정을 녹여주는 듯했다. "지아야, 난…" 그가 말을 잇다 멈췄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자, 온몸에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난 너만 보였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처음부터 너."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 모든 오해가, 결국 너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줄이야. 나의 첫사랑 시그널은, 이제 그의 손길에서 더 뜨겁게 빛나기 시작했다.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지만, 이젠 내 귀에 더 또렷하게, 그리고 더 달콤하게 박혔다.
그의 손이 닿았던 교과서 페이지는 나만의 보물이 되었고,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건 내 하루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여전히 태산이는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과 행동 하나하나에 나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늘 뭐 힘든 일 있었어?'
나는 웃으며 '별거 아니야'라고 답장했지만,
그의 작지만 섬세한 관심에 매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이런 작은 관심들이 쌓여서 우리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주말이면 우리는 작은 공원이나 동네 카페에서 소박한 데이트를 즐겼다. 한 손에는 각자의 음료를 들고 나란히 걷다가, 그가 불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우곤 했다. 그때마다 태산이는 픽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올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쑥스러워 웃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만 봐도 좋은 시간들이었다. 가끔은 도서관에 가서 나란히 앉아 각자 할 일을 하다가, 피곤하면 조용히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졸기도 했다. 그의 어깨는 언제나 따뜻하고 든든했다.
"졸려?" 어느 날 카페에서 책을 읽다 스르르 잠이 들었는지, 태산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내 머리 아래 태산이의 팔뚝이 살며시 받쳐져 있었다. 혹시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슬쩍 몸을 움직이려 하자, 태산이가 다시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왔다. "그냥 자. 괜찮아." 그의 따뜻한 팔베개 위에서, 나는 그 어떤 걱정이나 불안도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그의 숨결이 닿는 팔뚝, 귓가에 들리는 잔잔한 카페 음악, 그리고 그 옆에 태산이. 이 모든 것이 완벽한 행복이었다.
풋풋하고 간질거리는 첫 만남부터, 설렘 가득했던 바다 수학여행, 잠시 흔들렸던 오해와 감정의 확인,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왔던 그의 고백까지. 나의 첫사랑은 태산이 너였고, 너의 첫사랑도 나였다는 것을 서로가 확인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함께 만들어갈 우리의 이야기들이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기에, 이대로 영원히 너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미래도 두렵지 않았다. 서로에게 완벽한 첫사랑 시그널이 되어준 우리, 태산이와 지아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