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비가 미련스럽게 내렸다. 그 날을 말하는 거다. 지금 이건 회상인데, 문득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 날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 날 연준은 시안을 만났다. 너무 바로 본론인가 싶어 조금 자세히 적어보자면, 직업 특성상 잦은 야근을 하는 연준은 그 날도 어김없이 쌀쌀한 새벽공기와 함께 귀가하고 있었다. 매번 이 시간에 오면 사람은 물론이고 길고양이 한 마리 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저기요."
어, 나? 연준은 잠시 자신을 향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곧 그 애를 발견해냈을 때에는 분명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노랗게 빛났거든. 사실 가로등 때문이었지만, 빗소리가 요란한 와중에 야옹소리랑 저기요를 헷갈리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혹시 나쁜 사람 아니시면 저 좀 재워주실 수 있나요?"
뻐뜩 정신을 차렸다. 고양이가 이렇게 길게 야옹거릴 리가 없지. 사람,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되게 새벽의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여자애. 이 정도면 꽤 길게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 애가 유시안이었다. 그 애 입에서 나온 모든 문장이 이상하고 우스웠음에도 연준은 딱히 길게 묻지 않았다. 신발에는 빗물이 차기 시작하고, 고된 하루에 몸은 피곤하고,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지폐 뭉치를 얼른 세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것저것 따질 만큼 애가 공격성이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뭐랄까, 냥줍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연준은 한가지를 물었다.
"누가 보내서 왔어?"

너야 공격성이 없어보인다만, 네 뒤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다면 그건 좀 곤란하거든. 시안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보려는 듯 큰 눈동자를 데굴, 한 번 굴리더니만 별안간 이렇게 대답했다.
"...외로움?"
허, 하고 연준은 헛웃었다. 너 의외로 서정적인 면이 있구나? 그래. 니네 외로움한테 오늘 하루 너 좀 빌려간다고 전해. 첫만남은 그랬다. 때때로 충동적인 일탈과 때때로 충동적인 오지랖. 그 둘의 만남이었다.
"아 그런데 나 나쁜사람이야. 괜찮겠어?"
"총만 없으면 괜찮아요."
사실을 고백하자면 연준은 시안의 기준에 부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름의 유머였다거나, 자신을 나쁘다 칭하는 연준을 안심시켜보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세워진 유일한 기준에 연준은 완벽히 불합격이었으니까. 오른쪽 다리 뒷편의 차가운 쇳덩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왼편에서 자신을 따라 걷는 시안 또한 무거운 존재였다. 이 모든 것을 당시에는 그저 비 때문이라 여겼다. 몸이 습기를 머금어 무겁게 느껴지는 거라고.
"오빠아저씨."
회상은 끝났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빗소리도 점점 잦아든다. 그 날 하루만 재워주면 미련없이 떠날거라 생각했던 시안은 끈적한 습기마냥 연준 곁에 남았다. 처음에는 아저씨라고 마음대로 호칭을 정해버린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빠라고 부르라 했더니만 그 뒤로 쭉 저렇게 부른다. 오빠아저씨. 어쨌든 아저씨오빠가 아니라 오빠아저씨라 나쁘지 않다고 본다.
"오늘은 출근 안하세요?"
"내 맘이야."
"솔직히 말해봐요. 백수죠?"
무슨, 아니거든! 너 내가 얼마나 많이 버는 줄 알면 까무러친다! 연준이 답지 않게 크게 반응했다. 그런게 있었다. 시안 앞에서는 헛점을 보이는 게 싫었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연준은 일단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다. 오빠아저씨, 돈 없죠? 아니야! 직장도 없고요. 아니야! 아니면 부도가 났어요? 아니라고! 그럼 혹시 애인도 없어요? 아니야!
"...아니예요?"
연준은 시안이 방금 무슨 질문을 했는지 되짚었다. 애인의 유무. 애는 별 걸 다 묻네.
"응. 아니야."
"그럼 애인이 있어요?"
"그렇대도."
"한 번도 만나러 간 적 없잖아요."
네가 몰라서 그렇지 다 만나는 수가 있어. 연준이 우쭐거렸다. 애인은 무슨. 마지막으로 있었던 것이 얼마나 오래 전인지 기억조차 안 나는데. 연준은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가 속아넘어간 기분이었다. 마치 현재 애인이 있는 듯한 착각.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애인. 어쩐지 유시안의 모습과 흡사하게 그려지는, 오똑한 코에 저 똘망한 눈동자. 연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시안은 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뭐야, 넌 또 왜 그러는데? 연준이 괜히 틱틱거리며 안부를 살폈다. 시안은 얼굴에 기분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에 속했는데, 신기하게도 연준은 그런 시안의 기분를 비교적 쉽게 알아차려주었다. 이상해요. 별로일 때 바로 너 지금 별로구나 하고 알아주는거요. 혹시 따로 방법이 있어요? 그 질문에 연준은 좀 쓰게 웃었었다. 뭐 따로 방법이 있는 건 아니고, 사회생활이랄까. 눈치 제대로 못 보면 내 칼에 내가 찔려 죽거든.
"오빠아저씨도 의외로 서정적이에요."
짤린다는 표현을 칼에 찔려죽는다고 표현하다니. 되게 문학적이네요. 시안의 말에 연준이 움찔거렸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칼을 말한건데. 이거 뭐 정정해줄 수도 없고. 연준은 그냥, 내가 그랬냐? 하고 대수롭지 않은 리액션을 할 뿐이었다.
시안이 왜 시무룩한지 연준은 아예 모르지 않았다. 아마 시안에게는 자신밖에 친구가 없을 것이라 연준은 추측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쟤 맨날 귀가 시간이 일정하잖아. 한참 친구들이랑 놀러다닐 때인데 그러질 않은 것 같다고. 유일한 지인이 자신 외에 다른 사람과 깊은 유대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을 때, 기분이 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쯧, 연준은 시안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사실은 동정할 건덕지가 없기는 했다. 연준은 시안이 그 날 왜 자신에게 재워달라 요청했는지 알지 못한다. 왜 여태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지 알지 못한다. 연준은 물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직접 입을 열 것이라 여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