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있으면.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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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벙긋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하던 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지훈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던 여주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나는 꿈을 꿔."
"…뭐?"
설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여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나 말하기를 주저할 정도라면 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의미는 한가지 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꿀 수 있는, 잠들었을 때에만 꿀 수 있는 꿈.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가도, 단순히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생각에 여주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이야? 설마 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겠지?"
"말 그대로의 의미였으면 믿어달라느니 하는 거창한 말부터 하진 않지."
"그럼 앞뒤 잘라먹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여주의 표정에 지훈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이런 것들까지 생생하게 똑같냐. 잠시 그리 생각하던 지훈은 가볍게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내가 꾸는 꿈은 누구나 당연히 꾸는 평범한 꿈이 아니야. 내가 꾸는 꿈은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전부 현실이 돼. 이런 걸 아마, 예지몽이라고 하지?"
"예지몽을 꾼다고?"
"그래. 평균적으로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미래를 자주 보는데, 어쩌다 한번씩 내 미래를 볼 때가 있어.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도 그 꿈 때문이고."
"무슨, 꿈을 꿨는데?"
"같은 꿈만 꾼 게 아니라서 대충 요약하자면… 널 만나는 꿈이었지. 널 만나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꿈?"
"뭐야, 그게…."
"그냥 듣기만 하면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이 학교로 전학오게 되는 것도, 네 옆자리에 앉게 되는 것도, 네가 다른 사람들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렇게 둘이서 얘기하게 되는 것도. 전부 내가 봐온 꿈들의 일부거든."
어깨를 으쓱거리는 지훈의 말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지금 들은 말이 거짓이든 아니든, 곧이곧대로 전부 믿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것을 판가름하기 위해 굴러가던 여주의 머리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섰다.
지훈은 봤다고 했다. 자신의 행동을, 자신과의 일을.
'너,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리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전부 들리니까, 머리 꽤 아플 것 같더라. 그래서 매일 엎드려 있는 거지? 억지로라도 잠들면 그나마 덜 들리니까.'
'그걸, 어떻게….'
'다 봤거든.'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 없던 자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은 전부 보았기 때문이었다. 꿈을 통해 자신을, 자신과의 미래를 전부 보았기 때문에.
그제서야 지훈의 말이 앞뒤가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씩 정리해가는데,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무언가가 도무지 이해되질 않아, 다시 지훈을 마주한 여주가 물었다.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나한테 네가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너한테 내가 왜 필요한데?"
"너한테 내가 필요한 이유랑 똑같은 이유인데, 모르겠어?"
"무슨…."
"나도 안 꿔."
"…."
"너랑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꿈을 안 꿔. 내가 꾸는 꿈은 대상을 한정시킬 수도, 내용을 바꿀 수도 없어. 누군지도 모르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손이 닿거나 말을 섞으면 그 사람의 미래를 볼 때가 있어. 어디서 어떤 일이 있을지, 무슨 짓을 당할지 알면서도 난 그걸 바꿀 수가 없어. 그게 그 사람의 미래고, 정해진 운명이니까."
담담하게 말을 잇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괴로움에 물들어 있음을 여주는 확실히 느꼈다. 자신만큼이나 지훈 역시 힘들어했다는 것을. 자신만큼이나 지훈 역시, 괴로워했다는 것을.
그런 지훈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희망적일지, 여주는 뼈저리도록 알 수 있었다. 내내 자신을 괴롭혀온 남들의 생각이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를 알았으니까.
"그래서 너와의 미래를 보고, 무조건 널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꿈을 바꿀 수도 없고, 널 만나야만 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단순히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널 만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겸사 겸사 나도 널 구원해줄 수 있을 테니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
"…역시 꿈으로 보는 거랑 직접 겪는 건 다르네. 솔직히 꿈을 안 꾸게 되는 게 이렇게까지… 기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작아진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지훈의 진심을 토해냈다.
함께 있음으로서 서로를 괴롭혀온 것으로부터 서로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 일생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런 사람을, 이렇게 만난 것. 그것이 더할나위 없는 행복임을, 서로를 마주하며 깨달았다.
함께 있으면.
"그래서, 저건 네 꿈으로 봤던 상황?"
"맞아."
"평소에 얼마나 직설적이었으면 이런 상황까지 꿈으로 보냐."
"직설적이라기보단 좋고 싫은 걸 확실히 한다고 해주라."
그게 그거지. 그리 답한 여주의 시선이 교실 한켠에 모여 있는 여학생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는 꽤나 떨어져 있었지만, 입모양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대충 추려보자면, 그들은 지훈의 성격이 재수 없다든가, 생긴 것과 딴판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듯 했다. 전학온 첫 날부터 다가오는 여학생들에게 친해질 생각은 없다며 딱 잘라 말하던 전적이 있으니, 비슷한 상황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이상, 굳이 지훈을 까내리는 말을 여럿이 모여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시선을 돌린 여주가 지훈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여학생 무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는지, 자신에게 고정된 지훈의 시선에 관자놀이가 뚫릴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렇게 보는 거야.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 여주가 물었다.
"적당히 친한 척 해두는 게 앞으로가 편하지 않겠어? 안 그러는 내가 말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그런 거 필요없어. 별로 친해질 생각도 없고."
"진짜 딱 잘라 말하네."
"뭐 어때. 진짜인데."
"…나도 나지만 넌 더한 것 같다."
"내가 뭘?"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리는 지훈의 말에 대답 대신 웃음을 터트린 여주가 자세를 바꿨다. 지훈 쪽으로 완전히 돌아 앉아, 피하지 않고 그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고요한 눈. 그만큼이나 고요한 평온에, 여주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