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있으면.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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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륵. 마치 그런 소리가 나는 것처럼, 여주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각자가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교실을 한번 둘러본 여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것은 지훈이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지훈의 시선 역시 움직여, 여주와 마주했다.
"왜?"
그리 묻는 말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여주가 가만히 지훈을 바라봤다. 그런 여주를 마주한 지훈이 재촉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뒤늦은 여주의 대답이 들려왔다.
"새삼 신기해서."
"뭐가?"
"그냥 이렇게, 조용하게 지내는 거? 벌써 일주일 째인데도 적응이 안돼."
"곧 적응되겠지.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꼭 평생 같이 있을 것처럼 말한다?"
"그럴 생각인데?"
농담 삼아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것이 진심일 줄은 몰랐기에, 놀란 여주의 입이 닫혔다.
평생. 그 단어가 지닌 무게감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도, 생각하는 것을 멈춘 여주가 미소지었다. 단어 하나에, 말 하나에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지훈의 앞에서는.
"결혼이라도 해주려고?"
"네가 싫지 않다면."
장난스러운 말투로 오가는 대화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 안에 담긴 진심이, 들리지 않아도 느껴졌기에.
함께 있으면.
슬슬, 이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함께 다닌 것이 오늘로서 2주 째였다.
누군가의 생각을 들을 수 없게 된 여주는 스트레스가 줄어들었고, 사람이 많은 곳을 마음 편히 오갈 수 있었다. 지훈 역시, 누군가의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어 밤마다 걱정없이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가진 평생의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한걸음 앞으로 내딛을 것을 결정했다. 여주도, 지훈도.
"있잖아."
"사실은-"
내린 결정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미리 맞춘 것처럼 동시에 내뱉은 말에 잠시 멈칫한 두 사람이 이번에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타이밍이 신기해 웃기만 하던 두 사람이 또 한번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쯤 되면 서로 생각을 읽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과장스레 크게 숨을 내쉰 여주가 턱을 괴었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고개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지만, 이를 마주하는 지훈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뭐야, 대체. 내가 아니라 네가 남들 마음 읽고 다니는 거 아니야?"
"그럴리가."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타이밍이 딱딱 맞을 수가 있나?"
"안 맞을 건 또 뭐야."
너랑 내 사이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지훈의 말에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던 여주가 양 팔을 쓸어내렸다.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여주가 눈쌀을 찌푸렸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사귀는 줄 알겠다?"
"남들이야 우릴 보고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어. 고작 그런 일에 휘둘릴 시간에 너랑 있는 게 마음 편해."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할 수가 있냐."
"내가 뭘?"
"뻔뻔한건지, 부끄럽다는 감정을 못 느끼는 건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여주를 보던 지훈이 장난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여주가 곧 깊게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그리고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따라 웃으며, 감춰둔 속내를 내뱉었다.
"그냥 네가 뻔뻔하다고 치고, 나 먼저 말해도 돼?"
"말해."
"그 날부터, 남들 생각이 들리지 않게 된 이후부터, 계속 생각해봤는데 너한테는 말해두고 싶었어. 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됐으니까, 계속 숨기기보다 전부 말하고 싶었어."
"…."
"지금까지의 내 생활을, 내 기분을, 전부."
조심스레 이어지는 말을 끊지 않고 듣고만 있던 지훈이 씨익, 미소지었다. 뺨을 향해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말끔한 호선을 그렸다.
"딱히 생각이 들리는 건 아닌데."
"어?"
"우연인지 뭔지 몰라도, 자꾸 겹치네."
"…."
"나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거든."
멍하니, 지훈의 눈을 바라보던 여주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진짜로? 그리 묻는 것처럼 미간을 좁힌 여주에게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서야 피실, 웃음을 터트린 여주가 크게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냥 편하게 웃지.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참는 것을 보는 지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이나 그렇게 소리죽여 웃던 여주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 웃겨 죽는 줄 알았네."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는 몰라도 그냥 편하게 웃지 그랬냐."
"아무리 그래도 교실 한복판에서 혼자 웃다간 미친 사람 취급 당해."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뭐 어때. 난 그렇게 생각 안 할건데."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지훈의 말을 괜히 곱씹은 여주가 다시 턱을 괴었다.
지훈과 함께 있게 된지 2주. 처음 만났을 때는 지훈을 잘 몰랐기에 무작정 경계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지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훈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으니 더욱 경계했었다.
그런 자신에게 굳이 다가오지 않고 거리를 두던 지훈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날부터, 제 세상이 변해갔다. 처음이었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그리고 그런 말을 믿고 싶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생각이 들리지 않더라도, 속내를 알 수 없더라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전부 믿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결심했다.
"남들한테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얘긴데, 처음으로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자신의 속내를,
"너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스스로 드러낼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