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비가 내리는 날 밤

마지막이자 시작.

'오늘은 전국적으로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나가면서 우산을 챙기고 니엘씨에게 문자를 남기는 것도 있지 않았다.

'오늘 비온데요, 마지막이니까, 준비해줘요.'

그리곤 핸드폰 액정을 끄기 전에 팀장님에서 니엘씨로 바뀐 전화번호부를 한 번 더 확인하며 집을 나섰다.

여주의 메시지를 받은 다니엘은 집을 나서다 말고 도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들을 종이가방에 챙겨담고 출발했다.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

내가 가진 모든 시간과 내가 가진 모든 기억들이 오로지 의건이에게 달려 있던 지난 시간들이 이제는 정말 과거 뿐이 될 수 있는 날이 오늘로 찾아왔다. 기뻐하기엔 의건이를 사랑했던 그리고 그를 잃었던 지난 날들에 마음이 공허하고, 또 너무 슬퍼하기엔 앞으로 나의 곁을 지켜줄 내 옆의 사람이 너무 완벽했고,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어쩌면 이 날이 오게 된 것도 니엘씨 덕분인거고, 니엘씨를 만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 건 의건이 덕분이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괜찮아요. 너무 걱정 안해도 되요."

이런 내 기분을 알지 못할 니엘씨는 혹시나 내가 우울할까봐 슬퍼서 또 눈물을 보일까봐 쉽게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괜찮냐는 물음만 반복했다.

점심시간에도 예민하게 굴며 나의 표정을 살피던 니엘씨에 난 너무 괜찮은데,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서 나도 놀랐는데도, 괜히 막 웃지 않았다. 니엘씨는 얼마나 가슴졸였는지 몰라도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나의 기분을 하나하나 고려해주는 그런 다정함이 말이다.

"니엘씨, 내가 오늘 밤에 의건이를 만나면 뭐라고 할건지 알아요?"

"음.. 글쎄요. 난 많이 울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고맙다고. 하지 못한 작별인사, 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맙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또 니엘씨 몸으로 와줘서, 너무너무 고맙다고. 그렇게 말할거에요 나. 이제 나 좀 괜찮아 보여요? 나 진짜 괜찮다니까.."

니엘씨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말해주었다.

나도 너무 고맙다고. 작별인사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여주가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줘서,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에게 와줘서.

그 말을 들으니 우리의 첫 만남이 떠올라 피식-하는 바람세는 웃음소리를 냈다.

"왜 웃어? 나 진짜 진심인데."

"알아. 진심인거 너무 잘 알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자꾸 의건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왜 난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이름을 날 보며 부르냐고. 왜 늘 그렇게 슬픈 표정이냐고. 나에게 날카로운 말만 뱉던 니엘씨가 그땐 정말 미웠는데. 왜 하필 의건이가 이런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건지 이것조차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 사람이랑 회사에서 남들 몰래 서로를 꼭 껴안고 있다.

"우리 오늘 밤은 집 말고 다른 데로 가는 게 어때? 멋진 레스토랑이라던지."

"자기가 그렇고 싶다면 난 뭐든 다 좋지."

"자기? 너무 어색해."

처음들어보는 '자기'라는 애칭에 웃음이 터졌다. 나를 보며 덩달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던 니엘씨가 웃지 말라며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자기 싫어? 난 좋은데."

"싫은 건 아니구. 아무튼 그럼 오늘은 마치고 마로 레스토랑으로 가."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이라는 그 말이 평소와는 좀 다른 나의 최선을 보여주고 싶게 만들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어두워진 하늘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어둡진 않았던 것 같은데 비가 내리니 평소보다더 훨씬 어두웠다.

오랜만에 의건이가 돌아오는 신호였다.

"다들 오늘도 수고했어요, 내일 봅시다."

니엘씨가 일어나고 나도 뒤따라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내게 눈빛을 보낸 니엘씨를 따라 주차장으로 가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긴장돼?"

"조금."

"나두. 이제 진짜 끝이네."

"그치만 우리는 아니잖아."

"물론이지. 우린 이제 시작이지. 내가 의건씨 몫까지 더 잘해줄게. 여주야."

그렇게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음식을 주문한 후, 미간을 좁히던 니엘씨와 동시에 의건이가 돌아왔다.

"안녕. 오랜만이다."

나의 인사에 입꼬리를 작게 올리며 옅은 미소를 보이던 의건이의 표정이 슬퍼보였다.

하지만 난 오늘 울지 않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웃으며 의건이를 보내줄 거니까.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여지고 자연스레 포크와 나이프를 들며 말을 이어갔다.

"난 너랑 있는 매 순간 행복할 우리의 미래를 생각했어. 내가 상상한 미래는 늘 그렇게 행복했다?

작은 다툼도 하나 없고, 맛있는 걸 먹으며 행복하게 웃고, 같이 밤새도록 영화도 보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예쁜 여행지도 많이 다니고."

의건이는 말이 없었다.

의건이는 내게 작별인사를 나누면 이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말한 적 없었다.

아마 그도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된 거고, 어떻게 끝이 날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표정을 보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거라는 걸 그도 눈치 챈 모양이다.

"나 진짜 많이 힘들었는데, 그런 상상들을 해와서 더 힘들었나봐. 너랑 나의 미래가 물거품이 되어버렸잖아."

"미안해.."

"아니, 미안해 하지마. 나 이제 괜찮아. 네가 이렇게 돌아와줘서, 마지막을 알고 끝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난 진짜 괜찮은데. 이상하게도 자꾸 숨이 막혀와 계속해서 호흡을 다듬어야 했다.

"고마워. 하지 못한 작별인사, 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맙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또 니엘씨 몸으로 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낮에 니엘씨에게 했던 말도 그대로 전해주었다.

"있잖아, 나 이제 너 따라 죽겠다는 말, 다신 안할게. 너랑은 못했지만 그런 소소한 행복 누려볼게. 네 몫까지 행복해 볼게.

너를 잊을 수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이겠지. 의건아, 내 소중한 추억이 되어줘서, 앞으로도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이 되어줘서, 고마워."

의건이의 눈은 슬펐지만 의건이의 입은 웃고 있었다.

의건이의 눈에 맺힌 눈물이 빛을 반사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니엘씨가 나한테 엄청 잘해준다? 그래서 진짜 괜찮아 보려고. 네가 마지막에 한 말들, 잊지않고 지켜보려고. 네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어."

일부러 말을 막 준비하지는 않았다. 정말 그 순간에 하고 싶은 말들을 모조리 다 하고 싶어서.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그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서.

"의건아. 다음 생에도 내 친구가 되어줘. 내 연인이 되어주고, 평생 나랑 함께 해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져 무릎 위에 올려둔 내 손등에 닿았다.

"하하.. 이상하다.. 나 진짜 괜찮은데 왜 눈물이 나지.."

분명히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급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얼굴에 힘을 주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럴게. 꼭 다음생엔 네 옆에 오래오래 있어줄게.

최고의 인사야 여주야. 나도 너무 고마워. 나를 사랑해줘서, 나를 위해 눈물 흘려줘서, 그리고 이렇게 웃어줘서."

아직도 숨이 막혀서 숨을 너무 힘들게 쉬고 있는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웃었고, 나를 보고 같이 웃어주던 의건이는 그렇게 돌아갔다.

다시 니엘씨가 된 내 앞의 사람. 숨을 몰아쉬다 이내 나의 표정을 살핀다.

"잘.. 됐어..?"

"그럼. 물론이지. 어서 먹자 식겠다."

막히던 숨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리고 니엘씨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더 나아졌다.

내가 편안해질때 쯤, 내 눈물이 말라갈 때 쯤, 니엘씨가 웃으며 내게 선물을 건넸다.

"이게 뭐야?"

"선물. 열어봐."

작은 케이스가 나오고 케이스를 열자 눈부시게 반짝이는 목걸이가 보였다.

"우와.. 너무 예뻐.."

"내가 걸어줄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걸어온 니엘씨가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내 내 목에다 걸어주었다.

"주인 만나니까 더 예쁘네."

"이런건 언제 준비한거야?"

"그건 비밀.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