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락한 선배들
W.아룸쒸

"마셔."
"

"내가 독을 먹이겠냐. 그냥 좀 마셔."
"...왜 이래."
"뭘."
"왜 갑자기 착한척해...?"
"하..."

넌 내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이냐?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번 그 차가운 음성. 잊고 싶어도 안 잊히는 걸 어떡해. 비록 이들에게 그 무슨 감정도 없었지만, 충격은 오래갔다. 이젠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의심이 된다고.
벙어리 마냥 입을 닫고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한숨을 내쉬는 그였다. 에코백부터 진동이 느껴지고, 난 허겁지겁 폰을 꺼내들었다. 석진 오빠였다. 전화 좀 받는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주야, 학교에 무슨 일 있어? 경찰차가 서있길래."
"아...그게.."
-"응. 천천히 말해봐."
"
과연 말하는 게 맞을까? 말하는게 맞는데. 요즘 바쁘게 사는 오빠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살짝 목소리 톤을 올리고 아무 일 없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김태형. 손을 뻗더니 내 폰을 낚아챘ㄷ...???
"무슨..."
"여보세요."
-"...누구세요?"

"난 그쪽이 여주 남친이든, 썸남이든 상관 안 써요. 근데 정여주 오늘 죽을뻔한 건 알려줘야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오늘 과방에 납치범이 얘 납치할뻔했어요. 근데 내 친구놈이 살려준 거고. 정여주 충격 클 테니깐 한동안은 쉬게 둬요."
-"혹시 모르니 병원도 데리고 갈겠습니다.저 여주 사촌 오빠니깐 질투할 필요도 없고요."
"그게 무슨..."
-"이따 여주 데리러 갈 때 얼굴 한번 비춰줘요. 그쪽 친구들도. 감사 인사 좀 하게."
"되면."
-"그럼 이만."
휴대폰 화면이 꺼지고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쥐여주는 그. 황당했다. 진짜 미친건가. 한대 때릴까 했지만.

퍽 진지해 보이는 김태형에 관뒀다.


"
"오빠!"
"여주야!!"

"석진 오빠!!!"
오랜만에 오빠를 보니 너무 반가웠다. 우다다 달려가 오빠한테 안겼다. 오빠 많이 보고 싶었어? 그걸 말이라고 해? 이따 전정국한테 들었는데 마치 10년 만에 상봉한 가족 같았다고...

"안녕하세요. 여주 사촌 오빠 김석진이에요."
"박지민입니다."
"김태형이에요."
"전정국입니다."

"다들 어리고 훤칠하네."
"이제 가자. 나 배고파."
"알겠어. 그럼 저흰 이만 가볼게요."
"...저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가도 될까요. ㅁ, 무슨! 동그래진 눈으로 오빠를 쳐다봤다. 안돼!! 안된다고 해줘! 저들과 같이 먹으면 진짜 체할 거 같다고! 내 간절함이 통한 건지.

"같이 가요. 이모도 좋아하시겠네."
미세하게 웃으며 허락했다.

"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
저 오빠. 몇 년이 지나도 나 놀리는 건 변함없었다.

"요~정여주 왔ㄴ...어?"

"어?"
"헐. 너희 오랜만이다!"
한국대 천사들~! 대충 앉아있다 보내려고 했지만 씹인싸 정호석이 저들을 알았다.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해. 저 새끼도 한국대를 졸업했으니. 젠장. 엄마도 큰이모도 반기는 눈치였다. 이젠 난 몰라. 다 석진 오빠 탓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저요?"
"그래. 동글동글한 게 귀엽네!"
"전정국이에요."
"어머. 정국이 너무 귀엽다 여주야."

"저 샊...아니 저 선배가?"
"응."
"...엄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멀쩡해."
엄마 색안경을 쓴 거야? 어떻게 쟤가 귀엽지. 이곳은 미친 게 틀림없다. 석진 오빠한테 저놈들을 소개 준 것부터가 화근이었다.그냥 튀자. 그럼 되는 거야. 조심히 뒷걸음질 치며 튈각을 재고 있었다.

"여주. 어디가?"
"네?!..아.아하하...저 화장실.."
"화장실 그쪽 아닌데."
"아...하하하! 저 갑자기 젤리가 먹고 싶어서!"
"같이 가자. 나도 먹을래."
진짜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님 그냥 날 놀리고 싶은걸까 아님 그냥 날 놀리고 싶은 걸까.. 아마 후자가 맞는 거 같다. 실실 웃으며 쫄랑쫄랑 쫓아오는 그. 꽤나 정신 사나웠다. 지금이라도 튈까. 아냐. 잡히면 어떡해. 그래도 시도는 해봐? 주머니를 뒤척거리니 만 원짜리 지폐 하나가 나왔다. 이 정도면 택시 타고 집까지 갈 수 있다.
빈차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택시를 발견하곤 손을 붕붕 흔들었려는데 턱하고 잡혔다. 누구한테? 박지민한테. 아등바등해도 그의 힘을 이길순 없었다. 시발. 뭐 하자는 거야?
"뭐 하는 거야!"

"가더라도 나 젤리 사주고 가."
"돈 있잖아! 그거 쓰면 될 것을!"
"살려줬잖아."
"..진짜 그걸로 이러기 있음?"
"있음."
"쒸익..."
"가자. 나 젤리 먹고 싶어"
오...주여...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결국 편의점에서 젤리에만 5000원을 써버렸다. 저 개새끼. 흰색 신발 신고 물웅덩이나 밟아라. 이제 가도 돼. 뭘 가, 이 씨... 돈도 없는데. 그는 퍽이나 미안한 눈빛으로 젤리를 하나 내밀었지만 무시했다. 젤리로 풀릴 줄 알고? 꿈 깨.

"들어가서 표정관리 잘해."
"
"나 미움받기 싫거든."
"이미 저한테, 아니 나한테 많이 받았잖아."
"또 다르지 그건."
"개새끼."
내가 잠시 편하게 생각한 게 병신이었지.

결국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서로 많이 친해진 건지 벌써 엄마는 긴 와인병을 들고 있었다. 어? 잠시만. 와인...? 유레카. 그냥 다 술로 죽여버리고 집으로 가버리자. 난 빠르게 와인병을 들어 한 잔씩 따라줬다. 엄청 가득 채운 건 안 비밀.
첫 잔은 원샷이죠? 놀랍게도 저 말도 내가 꺼냈다. 집에 무척 가고 싶었거든. 내 말에 엄마도, 이모도 기분이 좋아진 건지 원샷을 때리기 시작했고 나도 숨길 수 없는 입꼬리를 올리며 와인을 마셨다.
"천천히 마셔..."
"알겠어. 오빠도 천천히 마셔."

"알겠어엉.. 취하면 혼난다아!"
"...오빠 눈 풀렸어."
"아닌뎅."
"그래...아니야..."
기어코 8명이서만 와인 3병을 클리어했다. 꼭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난 이미 상에 엎어진 뒤였다. 22년 인생 동안 이렇게 알코올이 많이 들어간 건 신입회 이후로 처음이었다. 분명 내 목표는 집으로 빨리 가기였는데, 그거 뜨거운 숨만 연거푸 해댔다.
"푸후..."
그다음부턴 나도 모르겠다.

"으..."
눈을 떠보니 누구 등에 업혀있었다. 석진 오빠인가. 어깨 넓네. 석진 오빠인 거 같아 꼼지락 거리다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벽에 거울이 붙어있는 거 같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거 같았다.
근데 석진오빠가 이 향수를 썼나. 하긴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바뀌었을 수 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석진 오빠는 집으로 들어와 잠시 기웃거리다 내 방으로 들어갔다. 말이라도 꺼내볼까 했지만 그럴 힘이 없더라.
푹신한 침대의 나도 모르게 사르르 웃었다. 집이 최고야...그렇고말고......아..잠 온다.
"...잘 자."
"
"...좋은 꿈 꿔."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얘기하고 싶었다.
오빠도 좋은 꿈 꾸라고.

"으어어억..."
"일어났냐 이 년아!"
"아!! 왜 때려어!!"
일어나자마자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엄마를 피해 도망 다녔다. 화장실에서는 정호석 새끼의 구역질이 들려왔고. 저 새끼도 어제 오지게 처마셨나 보네. 퍼억_! 악.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쿠션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진짜 왜 그러는데?!"
"아이고...내가 진짜 정국이한테 미안해서!"
"...선배? 선배가 왜?"
"이 년아! 어제 너 정국이한테 업혀서 들어왔잖아!!"
"뭐? 석진 오빠가 아니었어???"
"석진이는 너보다 먼저 취해서 언니랑 들어갔어! 너 취하고 못 움직이길래 정국이가 업혀준 거고."
"어어어어..."
"이거 정국이한테 전해줘. 미안하다고 하고!"
사고회로가 안 돌아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끌어안은 사람도, 날 침대에 눕혀준 것도 석진 오빠가 아니라 전정국이였어? 아아악! 난 방으로 달려가 침대 다이빙을 뛰고 이불킥을 쳤다. 미쳤어. 정여주 진짜 미쳤지! 혹시나 실수하진 않았겠지? 개소리를 지껄이진 않겠지? 어제 했던 모든 말들을 곱씹었다.

"


얼굴이 후끈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