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

__1942년 4월 20일
수빈은 유난히 꽃에 약했다. 알러지. 그래, 코가 큰 미국인 의학 교수는 그렇게 말했다. 알러지 때문에 눈두덩이며 코끝이 빨갛게 된 수빈을 남준은 매우 딱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에취! 남준은 익숙하다는 듯이 휴지를 뽑아 건네주었다. 수빈이 코맹맹이 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입을 꼭 다물고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부하는 수빈은 퍽 안쓰러웠다.


“공부하니?”
“아…시 쓰려고요. 시집도 내고……”


두꺼운 책 위로 올려진 원고지들을 보며 남준은 픽 웃으며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보드랍게 스치우는 느낌이 어느 시인의 유고시 같았다.


“시인이 꽃을 멀리해서야 쓰나.”


남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수빈은 잠자코 웃으면서 의자에 앉아 남준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런거 있는데요.”
“뭐? 알러지는 어쩌고!”


남준이 동그란 안경을 벗으며 소리쳤다. 아니 그걸 왜 그렇게 받아들여요, 꽃 말고- 뽀각. 그의 손가락에 전달된 진동과 짧고 묵직한 소리에 두 사람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이 정적의 흐름을 깬 것은 만두를 사 온 하숙집 동기들이었다.


“남준이 또 부쉈냐?”
“여전하다, 여전해.”
“수빈이는 좀 괜찮고?”


이번에 학교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만둣가게는 만두피에 어떤 혁신적인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곧 망할 것이 자명하였다. 텁텁한 만두소를 먹던 지섭이 결국 만두를 내려놓았다. 지섭을 시작으로 다들 하나둘씩 만두를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수빈이 만두에서 손을 떼었을 때, 남준은 먹다 남은 만두를 모아다 하숙집 뒤편의 개집에서 사는 개에게 가져다 주었다.


“근데 남준이 너는 안경은 또 왜 부숴 먹은 거야?”
“아.”


만두의 텁텁함 덕에 금방 잊어버린 안경이 다시 생각났다. 한순간 숙연해진 분위기에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에취! 수빈의 재채기 소리가 적막 속에서 울렸다.




__1942년 4월 21일
야마토는 기모노를 입고 다소곳이 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윤기 나는 머릿결과 하얀 살결, 발그레한 뺨을 가진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가 입은 푸른빛 기모노는 여인을 한껏 더 가녀려 보이게 했다. 예의 바르게 찻잔을 나눈 젊은 남녀는 어색한 침묵속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遠藤家の長男だと聞きました。(엔도 가문의 장남이시라 들었습니다.)”
“아... 네... 그렇습니다. 관동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네...


관동이란 말을 내뱉을 적에 가슴에서 커다란 응어리가 졌다. 환청처럼 십오 엔 오십 전이 맴돌았다. 여인은 부끄러운듯 얼굴을 돌리더니 말했다. 햇빛이 그 아름다운 얼굴에 부드럽게 내리쬐였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그러고 보니 제 이름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그렇네요. (그렇네요.)"
“こはる…です。(코하루…입니다.)”


‘마음의 봄’이라……노부부의 외동딸이라더니 정말이었나보다. 코하루는 수줍은 듯이 작게 미소 지으며 야마토를 할금거렸다. 두 사람은 행인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나 정작 본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허름한 저고리를 입은 자들은 카악 투! 하고 침을 뱉었고 말끔한 양장을 입은 일본인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소곤거렸다. 물론 그 뒤에는 감히 조센징이……가 따라왔지만 말이다. 코하루는 일본 갑부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잘 켠다며 또 수줍게 웃어 보였다. 발그레한 뺨이 더욱 홍조를 띠었다. 그러나 야마토는 죄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연신 차만 머금었다. 안타깝게도, 불행한 아가씨는 그것을 저처럼 수줍은 사내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야마토는 일어섰다. 이 약혼은 할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나요?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코하루가 문득 야마토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야마토는 당황한 채로 가만히 잡혀 있었다. 코하루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깜짝 놀라며 옷자락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내가 무례를…!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괜찮습니다….(괜찮습니다….)”
“そしたら、私の家に招待してもいいですか?(그...그럼......저희 집에 초대를 해도 괜찮으실까요...?)”


야마토는 목 부근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열기를 느꼈다. 낯설고 어색한 열기였다. 야마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하루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Hey, you. (어이. 거기.)”


카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뒤돌아보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It’s been a while, isn’t it? (오랜만이야, 그렇지?)”


미군의 군복을 입은 남자가 빙긋이 웃었다. 그는 키가 크고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Yeah, well……I have something to do right now, so I’ll just…go. (그래, 뭐……난 지금 할 일이 있어서. 난 갈게.)”
“Go? Well that’s not a pretty good welcome to hometown friend, huh? (간다고? 고향 친구에 대한 바람직한 환영 인사는 아니네, 그렇지?)”


카이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익숙한 억양, 익숙한 목소리. 저것을 경성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의 우연이란 기구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돌아서려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그가 하듯이.


“I suppose keeping ‘hometown friend’ standing on the street isn’t a pretty good welcome, either. (‘고향 친구’를 거리에 세워두는 것도 바람직한 환영 인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Ha! I can see that you’ve changed. I guess you have grown since that- (하! 역시 변했군. 그때를 계기로 자란 것 같은데-)”
“Well, thank you. You are just as same as always. (그래, 고맙네. 넌 예전과 달라진 게 없고 말이야.)”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잘라 말한 카이는 남자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주머니에 있는 권총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쏘고 싶었지만 쏘지 않았다. 그 대신 카이는 작고 소박한 교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쎄요!”


그곳에는 오로지 배우겠다는 열정만으로 이곳에 찾아온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리고 교실의 정중앙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학생이 오셨서요. Hosuk? Will you come forward?”


중앙에 앉아 있던 호석이 어깨를 쫙 펴고 나와 활기차게 인사했다. 놀음패, 그러니까 익숙한 얼굴의 등장으로 모두들 반가워하였다. 놀음패는 조선에서 천대받는 직업이라고 들었는데 다들 반겨주어 참 다행이었다. 카이는 한결 더 즐거운 얼굴로 칠판으로 다가섰다. ‘두 자릿수의 덧셈’ 이라 쓴 카이는 곧 여러 개의 문제를 써내려갔다. 12+34=  27+31=  56+43= 34+49=  29+10=  ……


“두 자릿수의 덧셈은 한 자릿수의 덧셈과 비슷해요. 먼저 일의 자리를 더한 뒤 십의 자리를 더하면 되거든요. 저기 세 문제 풀어보실 anyone 어디 없을카요?”
“제가 한번 풀어보겠소잉!”


나가 돈 배러 먹꼬 산다꼬 산수는 훤하지라. 호석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삐뚜름하긴 해도 제법 정갈하게 숫자를 써 내려갔다. 몇번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셈을 하던 호석은 매우 뿌듯한 얼굴로 답을 적고서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슬며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카이는 칠판에 분필을 사각거리며 설명을 하였다. 선교사로서 조선에 오고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들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잘하제? 나가 쬐까 배운 게 있어서!”
“Yes, of course. 잘하셨써요.”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나간 뒤 두 사람은 웃고 떠들었다. 호석은 카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카이는 호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대화는 통하고 있었다. 둘 다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상황임을. 진짜로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근디 그 꼬부랑말은 어째 하는거여?”
"뭐라고요?"
“퐐던? 뭘 팔어?”
“…?”
“…?”


…밥이나 허자. 나가 또 된장국은 기가막히게 끓여. 호석이 말했다. 앞으로 며칠간 배어 있을 된장 냄새에 카이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호석은 정겨운 냄새가 난다며 좋아했지만 된장은 여전히 먹을 수가 없었다.


“I’ll be back before you know. (금방 돌아올게요.)”


카이는 부엌으로 소리쳐 말하고서 집을 나섰다. 아무 곳에나 들러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I’m sorry but… 계속 그렇게 되뇌었다.




__1942년 4월 23일
“새로운 단원이라.”


연준은 제 앞에 선 태형을 바라보았다. 곁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지민이 서 있었다. 연준이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태형을 향해 여유롭게 말했다.


“사내들끼리 술이나 한잔 기울입시다.”
“…좋소.”


한 발짝 느린 태형의 반응이었다. 연준은 씩 웃었다. 어쩐지. 낮게 뇌까렸다. 세 사람은 조선인들이 꽉 들어선 술집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어색한 듯 보였으나 연준은 벌써 닥쳐올 쾌락을 준비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독한 술 한 병을 주문한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곧 기모노를 입은 주인이 술을 내왔다. 그는 이 사내들에게 굉장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세 사람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잔을 드십시다.”


연준이 말했다. 지민과 태형은 어색하게 잔을 높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치 술을 처음 하는 사람 같이 보였을 것이다. 자, 건배. 연준의 잔만이 부딪혔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런.”


이래서야 전혀 흥이 나지 않는구려. 연준이 중얼거렸다.


“술을 함께 하지 않으면 벗이 아니지.”


연준은 술잔을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연준이 담배 연기를 뱉어내고서 말했다. 태형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쩌면 경계였고 어쩌면 호기심이었다.


“만일 그대가 죽으면.”


연준이 다시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도 잔을 들었다. 술잔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은 고개를 젖히며 갈라진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내가 많이 슬플 것 같았거든.”


연준이 태형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시선을 돌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아니, 이것도 모두 숙련된 살인자의 연기일까. 지민은 옆에서 고개를 젖히며 술 몇 잔을 내리 들이켰다. 내 깜짝 선물을 준비한 것이 있는데, 다들 한번 보시겠소? 지민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 자식 취했네. 태형이 고개를 으쓱했다. 연준은 담배를 까딱였다. 그들 나름의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인 지민은 코트 속에서 자그마한 잡지를 꺼냈다.


“한글 잡지 아닌가.”
“아. 그럴리가.”


지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태형은 속으로 진지하게 이 취객을 어찌 집에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였다. 그리고 힐끗 앞을 보았다. 암살자는 은근한 미소를 띠고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상황 모든 것이 재밌어 보임이 틀림 없었다.


“그만하고 이제 가지. 곧 청년회 회의 시간인데.”
“신입이라 그런가 시간은 확실히 지키는군.”


갈 필요 없네. 아까운 시간 낭비하며 샌님들의 탁상공론 따위 들어줄 시간 없어. 연준이 말했다. 꽤 타당한 말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연준은 오직 목표물만 생각했다. 엔도 타다요시. 그 이름을 곱씹자 암살자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리고 어둠속에 희미했던 인영도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야마토…라고 했지. 연준은 침을 탁 뱉었다. 지민을 부축하던 태형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 야마토라는 이름을 가진 새끼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연준이 내뱉었다.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한 이해를 띤 얼굴이었다. 그것이 글과 별과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보이면 좋으련만.


“고충은 익히 알고 있소. 암살자의 삶이란 기구하기가 짝이 없어서.”


태형이 말했다.




“연기를 하셔도 되겠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지민이 정자세로 제 의자에 앉은 것을 본 태현이 말했다. 자리는 총 네 개가 비어 있었고 한 개가 새로 들어왔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우리 대한청년회 정식 단원은 아니나 이번 말모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실 분입니다. 태현이 입술에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나가 이 잡지 보고 찾아왔다 안하요!”


지민은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의 말씨임에 틀림 없었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