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정수연 (2)
말랑공 씀.
*본 글은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으니 보시는 데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정수연의 여섯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매년 다가왔던 그녀의 생일 때는 유일하게 집안에 냉기가 돌지 않았다. 대신 가식적인 온기가 집안을 맴돌곤 했다. 예전보다 눈치가 좋아졌던 정수연은 가식적인 온기임을 눈치챘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온기가 돌 수만 있다면, 부모님과 호석이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정수연은 뭐든 좋았다. 차가운 웃음만을 머금었던 평소보다, 쓴웃음만을 내보였던 평소보다 자못 나았다.
“수연아, 네가 전부터 갖고 싶어하던 인형이야. 마음에 들어?”
“웅, 마음에 들어. 너무 좋아. 고마워, 오빠!”
정수연은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방방 뛰었다. 아무리 눈치가 좋아졌다고 한들 그녀는 겨우 여섯 살이었고 한참 어리광을 부릴 나이였기에 인형과 함께 호석의 품에 폭 안겼다. 호석은 순수하기 짝이 없는 정수연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결심했던 무언가가 흔들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호석은 그 결심을 바꿀 만한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예정대로 그렇게 할 모양이었다. 호석은 정수연과 눈을 마주치며 어딘가 미안함이 묻어나 있는 것만 같은 말을 내뱉었다.

“생일… 축하해, 수연아.”
왠지 불안해 보이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호석의 얼굴에 정수연은 의문을 품었지만 어쩐지 안아 주고 싶어 더 꼭 안았다. 정수연이 안아 줬다기에는 덩치 차이가 커서 안긴 모습이 되었지만 말이다. 호석은 작고 여리여리한 정수연을 안으며 시나브로 코끝이 시려지는 것을 느꼈다.
***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은 정수연의 생일 파티를 꼭두새벽부터 준비하시느라 지치셨는지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드셨다. 정수연과 호석은 먼저 잠에 드신 부모님을 대신해 식사를 했던 흔적을 치웠고, 생일 파티를 하느라 벽에 붙였던 풍선들을 모두 뗐다. 그러고선 정수연은 꽤 피곤한지 하품을 했고 호석에게 폭 안기며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항상 잠에 들기 전 했던 인사였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따라 호석은 그 인사에 가슴이 시렸다. 그래서인지 호석은 정수연을 더 꼬옥 안으며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무겁게 삼키듯 내뱉었다. 정수연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는 호석에게 의문이 들었지만 별일이 아니겠지, 그저 변덕이겠거니 생각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무슨 일이냐며 호석에게 물어봤었더라면,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호석을 안아 줬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었을까?
***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호석은 여행가방을 들고서 거실로 나왔다.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그 누구도 깨지 않게. 호석은 지금 이 상황에서 부모님이 깬다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하며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신경이 곤두선 호석이 누군가의 인적에 놀라 들고 있던 여행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정적. 호석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눈을 비비적거리며 잠이 덜 깬 정수연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화장실을 가려다가 호석을 발견해 호석 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우응… 오빠, 거기서 머 해……?”
발음이 뭉개질 정도로 잠도 채 깨지 못 하고 호석에게 뭐 하냐며 묻는 정수연. 호석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꼬옥 안아 주며 속삭였다.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호석은 한참이나 정수연을 끌어안고 있더니 정수연이 숨 막힌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정수연을 놔주었다. 호석은 아까 떨어트렸던 여행가방을 다시 줍고는 그대로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잠이 어느 정도 깬 정수연이 호석에게 어디 가냐며 묻자 호석은 잠시 멈칫하며 새어나오는 눈물을 머금고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오려고. 금방 돌아올게, 수연아. 그러니까……”
기다려 줘. 잘 버텨 줘. 호석은 마지막 남은 양심에 찔려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호석은 순수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정수연에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채,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채 현관문 너머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호석은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