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친애하는 숙적친애하는 숙적에게, 당신을 사랑한건 내 의지지만 이가 날 사랑한건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깐. 부정한 그 넋조차 고의었기 때문.
빛이라곤 깜빡이는 가로등 하나, 낡은 골목길 사이에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쓰러져 있는 남자. 반쯤 눈을 감고 잃어가는 의식을 지독한 정신력으로 붙잡은 그는, 복부를 타고 새흐르는 피를 보곤 처연하게 짝이 없다며 곤란스런 처지를 한탄했다. 낮밤없이 드리운 그림자로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비포장 골목길 사이로 위태롭게 감쌌다. 거칠은 길목끝 위로 고갤 내민 돌부리들은 사납다간 또 거세어 붙잡은 태형의 손을 심술궃게 각쳤다. 유은이 손에 난 생채기와 복부에 깊게 베인 상처로는 턱없이 하잘것 없다는 듯 미동도 없는 얼굴로 내리보며 비웃자, 태형은 파리해 강파른 상태로 연신 식은 땀을 흘리더니 유은을 노려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 그렇게 질려하더니만. 너도 결국은 그 거지같은 조직배나 다름없는거 아니야? 나한테 이렇게 까지 한 이유는 이제 알겠는데, 차라리 쓸데없이 시간 끌 바엔 그냥 깔끔하게 손털고 가서 니 윗대가리한테 꼬리나 살랑거리지 그래. 충실한 사냥개가 가서 설설기면 퍽이나 반기겠.., 아악. ”
“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해야지. 안그래? 조직배나 다름없는게 아니라 내가 윗대가리야. 그 새끼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다고. 충신한 사냥개라니, 병신같은 놈. ”
“ 너한테는 배신이 쉬웠겠지. 아니, 날 사랑한 적은 있었는지. 하다못해 네 사랑에 뿌리까지 의심돼. 거짓은 숨쉬듯이 반복하는게 니 일상이었잖아. 아니야? ”
“ 순박하긴. 아직도 사랑놀음 타령이나 하는거야? 그러게 내가 사람 함부로 믿지 말랬잖아. 우리 관계에 어짜피 그런 낭만적이고 촌스러운 감정 따위는 태초에 피어날 조짐도 없었어. 멍청하게 굴지마. 너도 알고 있으면서 착각하는 척 날 위한 주제에. ”
“ 이기적이게 구는건 예나 지금이나 틀림없었는데, 나만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네. 하, 난 착각한 적 없어. 알았다면 지금 이 꼴이 날때까지 가만 있진 않았겠지. ”
유은은 마치 사냥감을 앞에두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소름끼치게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마주한 태형이 주눅들긴 커녕 뭐가 그렇게 재밌냐는 듯 되려 따지며 비아냥거렸다.
“ 그냥, 웃기잖아. 지 처지를 아는건지. 그 와중에 이 악물고 버티고 있는게. ”
다음순간 그가 조각난 유리를 유은을 향해 던지자 유은은 이를 아주 쥐었다. 하필 쥔 주먹 틈으로 피가 흐르다못해 한참 고여 바닥에 맞닿아 튀었다. 유은이 그를 향해 꽤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다는 듯이 잇따라 계속해서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맥없이 기울어진 그의 턱을 치켜들고 그의 옆을 스치도록 유리 조각을 떨어뜨렸다.
“ 더럽게 지독하긴. 지금 깨진 유리는 이미 온전하지 않았어.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지금 네게 칼을 들이미는게 널 사랑한 내가 망가졌기 때문이 아니란걸. 아니면 못견디는 건가. 애초에 진실 하나없는 거짓이었단 사실이 뭐 그렇게 버거워? 그건 거무 나약하지 않은가. 우습기는, 푸하핫. ”
“ 끝까지 비참하게 만들지마. 꼴이 우스운건 너겠지, 미쳐버린 사냥개라니. 뭐 한 번 사정없이 모욕적인거 아냐?
.. 윽.”
“ 그따위로 부르지 말랬지. 어짜피 죽을 거 좀 더 고통스러워도 상관없겠지.”
유은이 태형의 상처 옆부근을 힐 뒷굽으로 지긋이 짓이겼다. 충분히 지쳐버린 태형은 조용히 발악하다 죽는것조차 어려웠다. 보다못한 태형이 고개를 숙인 유은에게서 칼을 빼앗아 저의 손으로 다시한번 제게 욱여넣었다. 그 순간 유은은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피를 고의적으로 고의적으로 고요히 지켜보았다.
도와줄까?
미쳤구나.
알면서 뭘
손톱만치도 없는 마지막 동정에 핏기가 내비치도록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의 앞에서 조금만치도 흠은 없었다며, 무너진건 너 스스로라며 않았으면 없었을 책임을 이리 저리 엮었다. 더없이 불품없고 하찮은 그의 앞에서 위태롭게 떨어지려 맺힌 눈물이 딱 한번 흘렀다. 그가 흔든 마지막이 이리도 괴로울줄은 몰랐는데.
“ 울지는 마. 후회도 말아주고. 난 정말 널 사랑했던 모든 기억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우니깐. 가식은 네게만 있던 거거든. 지금은 전부 소용없어졌으니깐. ”
“ 그딴거 시켜도 안 해. ”
서로 불일치한 굽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것도 잠시,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그새 다잡고 어느새 멀어지는 뒷모습을 태형은 하염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의식을 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