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짜 남편
W. 진정성
"... 뭐?"
"얘기 좀 하자고."
확연하게 보이는 차이. 거만한 말투와 깔보는 눈빛. 역시나 내가 알던 권순영은 아니다. 사회를 살아보니 알겠다. 권순영이 전여주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이유. 그건 바로...
"싫어."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뭐라는 거야."
"착각하지 마 권순영. 내가 그럼 너가 뭐... 나 두고 갔다는 이유로 정신병이라도 걸려서, 너 잊지도 못하고 질질 짤 줄 알았냐?"
"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사람의 태도가 아닌 건 알겠다. 순영아."
"나한테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너?"
"아니? 나 너한테 이제 전혀 관심도 없어서."
"거짓말 아냐? 네가?"
욱했다. 그 말에. 자신 없이 살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던 소꿉친구가 변한 게 그리도 아니꼬운가? 당연히 전여주는 권순영을 잊지는 못했다. 물론 그건 순영도 원한 게 아니었을 테니까. 권순영은 지금 전여주가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이렇게 만나서 우결 따위의 프로그램을 찍는 것도 다 자신의 시나리오에 있는 거였을 게 분명했다. 권순영의 프로그램 안에서는 전여주가 권순영을 보고 반가운 나머지 눈물마저 터뜨리고 권순영은 따스하게 안아주면서 잊지 않았다, 따위의 말을 이으려고 했겠지. 전여주는 치기 어린 마음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분노.
"야. 말 똑바로 안 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거, 되게 역겨워."
"... 뭐라고?"
권순영의 얼굴빛이 파랗게 변한다. 행복감에 물들어 말을 마구 뱉어냈다. 근 오 년을 참아온 멘트.
"야, 권순영. 다시 말하는데. 나 너 따위 필요도 없고,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는데 내 앞길 가로막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전여주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비상구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갔다. 위로 묶은 포니테일 머리가 마구 흩날린다. 통쾌한 마음이 머릿속을 상쾌하게 바꾸었다. 아, 시원해. 이렇게 시원하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다. 전여주는 이틀 전만 해도 권순영 때문에 끙끙대던 자신이 바보같아서 실소가 터졌다. 전여주의 마음 속에 짙게 칠해져있던 권순영이라는 색을 다 벗겨내자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 고민은 택시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2주 뒤가 촬영이다.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딴 면상 보면서 사랑 놀음을 할 생각은 없었다. 기분이 다운된다. 그딴 자식 때문에 기분 망치는 게 눈물 날 정도로 싫었다. 이건 권순영 때문에 나는 눈물은 아니고... 짜증이었다. 권순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 같잖아서 나는 짜증. 그런 새끼를 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좋아한 건지 모르겠다. 전여주는 '오빠' 라고 저장된 번호를 꾹 눌렀다. 세 번의 신호음과 다정한 목소리.
"여보세요? 여주 왜?"
"오빠. 나 권순영이랑 프로그램 찍어."
"... 오빠 일 끝났는데 우리 여주가 좋아하는 떡볶이나 먹으러 갈까?"
"응. 아님 오빠가 해줘도 좋구."
"오빠 집으로 와. 오늘 둘이 회식하자. 어때? 프로그램 찍는 기념으로."
"너무 좋다."
"조용히 떡볶이 만들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좋아. 끊을게, 오빠. 이따 봐요."
"응, 보고 싶어. 빨리 와."
어쩌면 연인보다 다정하고 사탕보다 달콤한 우리 오빠. 으아악. 다른 여자가 데리고 가면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수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여주는 하루를 상쾌하게 끝을 냈다. 집에 가는 길에 듣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갈 정도. 푸른 하늘이 예뻤다. 떡볶이가 아른거리고, 오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 행복감의 최대치. 전여주는 조용하게 읊었다.
행복이 이렇게 옅고 길게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