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ㅣ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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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죽는다는 생각에 체념했지만 이 남자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후 죽고 싶지는 않아 계속 발버둥을 쳤다. 하이힐을 신고 온 게 불행 중 다행인지 나는 하이힐을 벗어 그 남자를 가격했다. 그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마 하이힐로 세게 맞았으니 뼈 하나라도 부러졌을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 미친듯이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 남자는 금방 일어나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 또한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지만 안간힘을 쓰며 달리고 있을 때, 멀리서 실루엣 하나가 보였다. 나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듯 소리쳤다.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은 건지 그 실루엣은 내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결국 그 남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 남자는 달려오는 실루엣을 보지 못 했는지 내 위에서 손을 포박했다. 점점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나는 저항했지만 성인 남자의 힘은 이길 수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위에서 손을 포박하며 나에게 집중하느라 사람이 오는 걸 몰랐던 그 남자는 철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수갑을 든 경찰을 보자 욕을 낮게 읊조리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경찰은 바로 그 남자의 손을 잡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내 시야를 가리는 눈물 탓에 경찰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 했고, 나는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 앉은 상태로 울기만 했다.
“괜찮아요? 안 다쳤죠?”
“네… 괜찮아요.”
“다른 경찰도 불렀으니 그 경찰이 부축해 줄 거예요, 이 놈은 제가 데려갈게요.”
“감사합니다, 진짜 너무 감사합니다… 죽을 뻔 했어요.”
“다행이에요, 저항하느라 좀 다친 것 같은데 곧 올 경찰이랑 병원도 가봐요.”
“병원 갔다가 바로 서로 오세요, 조사 받아야 하니까.”
“전부 경찰이 해줄 거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네… 감사합니다.”
그 경찰이 범인을 데려가고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진정될 때 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곤두세워진 신경에 또 긴장했지만 곧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긴장을 풀었다.
“경찰입니다, 긴장 풀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 꽤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경찰이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자세히 보였고, 그 경찰은 다름 아닌 정국 씨였다. 정국 씨는 퍽 놀란 듯 보였으며, 나는 정국 씨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나는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정국 씨에게 안겼다. 나의 사정을 어느 정도 들은 정국 씨는 나를 피하기는 커녕 토닥여 주며 물었다.
“세연, 세연 씨가 왜 여기에…”
“나 진짜 무서웠는데… 왜 이제 왔어요.”
“나 죽을 뻔 했어요, 그 놈한테.”
“내가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세연 씨는 예뻐서 타깃 되기 쉽다니까.”
“다행이에요… 아직 세연 씨 얼굴 볼 수 있다는 게 행복하네.”
“다친 곳은 없어요? 분명 다쳤을 텐데.”
이제껏 정신이 없는 건 물론, 극심한 공포감에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정국 씨의 말을 들으니 고통이 느껴졌다. 포박되어 있던 손목은 힘 때문에 피멍이 든 건 물론, 아스팔트에 짓눌려 피까지 흘렸다. 하이힐을 신은 채 급하게 뛰느라 발목 또한 미친듯이 아팠고, 넘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생채기가 생겼다. 저항하며 범인이 내 얼굴에 손을 대기까지 해 얼굴에도 상처가 있었다.
“이게 뭐야, 속상하게…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요?”
“나는 그냥 정국 씨 때문에 힘들어서 술 마신 것뿐인데… 이렇게 될 줄 몰랐죠.”
“… 나 때문에요?”
말 실수했다. 그 범인 때문에 술이 좀 깨긴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술기운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나는 당황해 횡설수설했지만 정국 씨는 내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 듯 했고, 결국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요즘 정국 씨가 나를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서운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