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아닌 네명min9311님이 작성함
사장과의 전화를 끊고
오늘 받은 쪽지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서 가.. 말아..'
쪽지의 조언을 들을 것인지, 사전 약속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지금까지 쪽지의 조언을 한번도 어긴 적이 거의 없었기에 더
불안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붙잡고 해답을 물어보고 싶은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
그러나 그것 역시 해답이 아니란 자각이 들었고 결국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앉았다.
"하..."
"왜 한숨이에요"
"깜짝이야.. 자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일 있어요?"
"다.. 듣고 있었어요??"
"들은건 아니고, 들리길래."
"아.. 있잖아요. 그게, 만약.."
나답지 않다.
자연스럽게 입을 열다 깨달았다. 방금 전 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걸까. 더군다나 이 맏기 힘든 이야기를 어디서부처 털어놓아야할지도 애매했다.
"만약... 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
그리고 공백.
그러나 잠깐의 텀이 지난 후, 다소 차분해진 그의 목소리가 더시 그 공백을 매웠다.
"흠... 나라면 말이에요."
"만약- 그 정도의 초초한 마음으로 고민하는 일이 있다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쪽을 선택할 것 같아요"
"...네?"
"물론 이게 답변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꼭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그의 대답에서 온기가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그걸 어떻게.."
"굳이 내 기분이나 상황을 설명하자니 애매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상대방이 알아서 나에 대해 좀 알아줬으면 할 때가 있잖아요."
"
"아 주제 넘은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해요.
근데 지금이, 그런 순간처럼 보여서요"
'아..'
"그, 그런거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나만 그런걸로."
.....
모든 걸 무장해제 시킬 듯한 그의 해사한 웃음에 순간 모든걸 털어놓고 싶단 충동이 들기도 했다.
'하... 신기하고.. 재밌는.. 사람이었어.'
저런 사람이 만약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내 인생이 조금을 덜 외로웠을까."
어느새 진짜 잠이 들어버린 그, 그를 태운 버스가 그렇게 지나갔다.
"휴..."
쇼핑몰 본사 건물 옆에 딸린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도 들어가도 될지 수만 번은 망설이게 됐다.

"...."
_민지씨 여기서 뭐해 안 들어가고.
근데.. 이 캐리어는 다 뭐야? 꼭 집 나온 사람처럼. 아님 어디 여행이라도 가?
"아 그게요.. 뭐.. 여행이라면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나저나 오늘 밀린 월급 주신다고 했던 날인 거 기억하시죠? 오늘은 꼭.."
_일단 오늘 촬영부터 해.
그리고 늦어놓고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솓아올랐지만 오늘은 무산 일이 있어도 월급을 받아야만 하기에... 참아보기로 한다.
_근데..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너무 빠지면 곤란한데.
"언젠 모델컷 잘 나오려면 더 빼야한다고 하시더니..."
" .... 잠깐만요 근데 오늘 무슨 촬영하는데요?
뭔가 좀 이상한데."
_무슨 촬영이긴. 다, 당연 옷 촬영이지...!
민지씨 혹시 의심병 있어? 얼른 내려가!
그러나 나는 오늘 꼭 밀린 월급을 받아야만
했고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지만,
쪽지 내용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내려갔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로 꾸며진 스튜디오.
평상복이라고 하기엔 노출이 심해도 너무
심한 의상이, 나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아...이거 뭔데."
_아~ 이거? 내가 말 안했나? 우리가 새롭게
란제리 쇼핑몰도 오픈해보기로 했어.
_근데 모델이 생각보다 잘 안 구해지네,
그래서 모델 구해질 때까지만이라도 민지씨가 이쪽 모댈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아.
"예? 뭐라고요?"
_뭘 그렇개 놀라. 민지씨 정도면 경력도 꽤
있으니까 잘할 것 같아서 믿고 맏기는거지.
_그리고 어짜피 민지씨도 이제 성인이니까
상관 없잖아?
"아..."
"...웃네.
넌 지금 이 상황이 재밌나봐? 소름끼치게."
인내심의 한계.
"생전 촬영 결과물도 신경 안 쓰던게 갑자기 스튜디오 나와보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서 튀어나오는 반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물론 딱히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_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월급 받기 싫어?!!!
_내, 내가 진짜 이런 말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민지씨가 모델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매출이 뚝 떨어졌어!!
_나니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라고!!
"언제는 저 모델 된 후로 매출 올랐다면서요."
_자,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거지!!
또 다시 시작된 갑질.
.. 지겨워
_ 그리고 너 여기 처음 계약할 때, 계약 조항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_'을'은 무조건 동의한다는 거였다고. '갑'이 제안하는 촬영 컨셉이 뭐든!!
_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오늘 촬영 안 하면 월급을 줄 의무가 없다는 뜻이지. 알아들어?
"아..."
_그리고 여자애가 맨날 따박따박 대들기나 하고 말이야!
"사장님. 남 속여먹는 이런 짓..
이제 그만 좀 하시죠.
"월급은.. 원래 줘야 하는게 맞는거고..."
나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곤 전혀 없는 사장에게 더는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단, 을은 갑이 요구하는 작업물에 대해 윤리적 이미지를 손상하거나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단할 경우....거절할 수 있다.' 는 조항은 왜 쏙 빼먹으세요.
_뭐라고..?
_너.. 너 그걸 외우고 있었어?!!
"내가 그동안 바보라서 참고 있었던 것 같아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고, 더러워서 피하지"
_그래서 내가 지금 똥이라는거야??
이게 진짜!!!
사장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나를 한 대 칠 것 같은 살기 가득한 표정에,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무서웠다. 무서웠는데..
"먼저 계약서를 운운하셨으니까, 그 김에 저도 하나 더 말해볼까요? "
"오늘 촬영에 임하지 않으면 월급을 줄 의무가 없다고 했죠. 하지만 계약서상에는 분명 촬영 후 7일 이내에 금액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내용도 있을텐데.."
".. 지금 몇 달이나 밀렸더라??"
내 쪽으로 다가오는 사장에 뒷걸음질 치면서도 하고싶었던 말을 다 토해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이 대화 전부 녹음했어."
_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신변을 지키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뿐,
하지만 곧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표정을 바꾼 사장이 말을 이어갔다.
_아~ 네가 어려서 뭘 모르나본데,
그런 녹음으로 협박하는거. 그것도 불법이거든...다시 말해서 효능이 없다고요.
'아.. 망했다'
_그러니까 좋은말로 할때 핸드폰 내놔.
하지만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무서우니까 핸드폰 달라는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밀린 월급 주세요. 그럼 나도 퍼트리진 않을 테니까."
_아 진짜 이게.. 좋은 말로 해선 안되겠네??
_야, 문 닫아..!!!!!
다시 표정을 굳힌 사장이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진작가에게 내가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막을 것을 지시했다. 언젠가 사장의 조카라고 소개받았던 사람이었다.
_핸드폰 내놓으라고!
사장은 내가 들고있던 핸드폰을 빼앗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아..!!"
그러다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 곳곳에 세워져 있던 기다란 조명을 건드리고 말았고.
'이대로 죽는건가..? 나 어떡해..'
내 쪽으로 쓰러지는 조명을 보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