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린 다음 일정인 동물원에 왔고 생각보다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문득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동물원에 갔던 날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기 전, 즉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우리 세 명은 다같이 동물원에 갔었다. 난 아빠, 엄마 속을 꼭 잡고 해맑게 웃으며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때의 내 눈에 동물원 정말 동화 속 같았다. 책으로만 보던 곰이 아기곰을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있었고 기린들은 사이좋게 풀을 뜯어먹으며 일상을 즐기는 그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서 정말 꼭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비록 이젠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있진 않지만 역시나 동물원은 여전히 내게 동화 속 같은 곳이었다.
“ 여주야 저거 봐! 토끼야 토끼 ”
“ .. 귀엽네 ”
“ 토끼는 당근 잘 안 먹는구나.. ”
“ 당분이 높아서 잘 못 먹어. “
” 뭐야 되게 잘 알고 있네..? “
” 예전에 책에 본 적 있어 “

” 봐, 좋아하면 그렇게 찾게 된다니까 “
“ 어? ”
“ 내가 너에 대해 계속 찾고 궁금해하듯이 너도 토끼에 대해 찾고 궁금해했잖아, 좋아하니까 “
” … “
” 사람은 다 그래. 본능적으로 “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본능적으로 토끼에 관한 책을 읽었던 것이니까.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직접 도서관까지 가서 책을 대여했었으니까
” ㅎ..헛소리 하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지마 “
” 합리화? 뭐 그것도 맞는 것 같네 ”
“ .. 다른 거 보러 갈거야 “
” 그래! 저쪽엔 사자와 호랑이가 있답니다~ ”
“ 너랑 간다고 안 했거든?! ”
정말 종 잡을 수 없는 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아이에게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 빠져나오려 애를 쓰면 쓸 수록 더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었고
내 몸안에 있던 힘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계속 빠져나갔으니까
“ 우와.. 곰이다 “
” 멋있다. “
” 곰이 좋아, 토끼가 좋아? ”
“ .. 난 곰 ”
“ 왜? ”
“ 곰은.. 날 지켜줄 것 같아서 ”
어릴 때부터 토끼랑 곰을 좋아했다. 토끼는 내가 지켜주고 싶을만큼 여리고 귀여워서, 곰은 날 지켜줄 수 있을만큼 든든하고 멋져서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늘 곰을 골랐었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곰을
” 그럼 지금은 내가 곰인건가? “
” 뭐? “
” 난 널 지켜줄 수 있고 또 지켜줬으니까 “
” 허.. 넌 곰이 아니라 토끼다, 토끼 “
” 토끼? 그럼.. “
"..?"

” 나를 막 구해주고 싶다는 이야기~? “
” .. 꺼져. 진심이야 ”
“ 아잉~ 그러면 나 서운해 ”
그 아이는 내게 ‘달’ 그 하나였다. 곰도 아니고 토끼도 아닌 그 어떠한 다른 존재도 아닌 ‘달‘ 그 자체였다.
나를 무조건 지켜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무조건 지켜줘야 할 사람도 아니니까
그저 내가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앞을 밝혀주는 ’달‘이었을 뿐이다.
그때, 안내방송이 나왔다.
“ 잠시 후 우리테마파크의 자랑, 곰순이의 특별쇼가 있을 예정입니다~! ••• “
” 저게 그 곰돌이 쇼인가봐 “
” .. 나 말고 부반장이랑 봐야하는 거 아닌..ㄱ “
” 아이 진짜!! “
” 푸흐.. 장난인데 뭘 “
” 그런 장난은 함부로 치는 거 아니거든? “
” .. 얼른 가서 자리 맡아두자 “
” 어어~? 말 돌리지 말고! “
그렇게 우린 맨 앞자리에 앉아 곰돌이 쇼를 기다렸고 뒤를 보니 부반장도 와 있었다. 쟤가 보기엔 내가 너무 눈엣가시겠는 걸..
부반장 옆 애들은 딱 보아하니 날 보자마자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뭐 어떡해, 얘가 같이 보고 싶어하는 건..
스윽,

“ 왜? ”
“ .. 못생겨서 “
” 뭐?! 나 그런 말 진짜 처음 들어..!! “
“ .. 농담인데 ”
“ 너 농담을 되게 진지하게 치는 경향이 있어 ”
“ 그런가.. ”
나, 같이 보고 싶어하는 건 나인데
잠시 후, 곰돌이 쇼가 시작되었고 곰순이라는 곰이 나와 사육사와 여러 묘기를 보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푹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봤다.
그때, 사육사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 자~ 혹시 여기 커플 체험 한 번 해보실 분 계신가요? ”
“ 체험..? ”
“ 가까이서 곰순이에게 먹이를 줘볼 수 있는 체험이에요! ”
” 아.. “
매우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커플이 아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왜 저런 건 늘 커플 체험으로 시키는지..
그때,
스윽,
” 저희요! “
"..?!!"
냅다 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들어 하겠다고 외쳤고 사육사분께선 아주 용기있는 남자친구라며 우리를 무대 가운데로 불렀다.
어떨결에 불려나간 나는 화도 못 내고 그 아이와 함께 먹이를 주었다. 뭐.. 먹이 주는 건 재밌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부반장 걔도 있는데 커플은 심하잖아
“ 너 진짜.. ”
“ 나 덕분에 곰순이 먹이도 줬잖아~ 화 내지 마 ”
“ 뒤에 부반장도 있었잖아..! ”
“ 그게 왜? ”
“ 걔가 너 좋아하는 거 몰..ㄹ ”

“ 난 걔 안 좋아해. ”
“ ㄴ..너 ”
차가웠다. 그 한 마디에 느껴진 냉기에 난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직접적으로 느껴본 것은 처음이라, 생각보다 더 차가운 그 냉기는 순간 내 몸과 머리를 모두 얼리는 듯 했다.
“ 나도 걔 신경 안 쓰는데, 왜 니가 걔를 신경 써? ”
“ 아니 나는.. ”
“ 적어도 나랑 있을 땐 나만 신경 써 줘. 응? ”
“ .. 알았어 “
나는 알지 못했다. 우주란 곳이 얼마나 추운 곳인지를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아온 존재는 얼마나 차가운 냉기를 갖고 있는지도
그렇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난 알아서 조용히 윗층 다락방을 사용했다. 이곳 제주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다.
뭐 다들 내가 어색할 거고 무엇보다..
같이 섞인다는 것 자체에서 혐오감을 느낄테니까
그때,
띠링,
“..?”
그 아이의 번호로 문자가 왔고 잠깐 산책을 나가자는 문자였다. 가뜩이나 많이 걸어 발이 아팠던 난 나가지 않겠다 보냈지만 안 나오면 밖에서 밤을 새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 결국 난 밖으로 나갔다.
“ 어? 나왔네?! ”
” 아무리 봄이라도 추운데 밤을 왜 새 “
” 그래도 나 걱정되서 나온거지? “
” .. 뭐래 “
” 얼른 가자! 아까 저기 산책로가 하나 있더라고 “
” … “
그렇게 나와 그 아이는 산책로라고 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다와 맞닿아있었고 정말 밤에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다.
“ 여긴 또 언제 봤데.. ”
“ 예쁘지? “
“ .. 예쁘긴 하네 ”
조용한 적막 사이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풀벌레 소리, 풀 숲 사이사이서 빛나는 반딧불이까지
정말 편안하고 좋았다. 마치 동화 속처럼

“ 달도 예쁘다 “
” … “
정말 동화 속에 들어온 듯 했다. 이 아이와 있으면 늘 그랬다.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모든 것이 환상 같았고 따뜻했고 편안했다.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고 고요히 잠도 잘 수 있었다.
그런 넌 내게 왕자님 같았다. 비록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언제든 공주의 손을 잡고 함께 무도회에서 춤 춰줄 수 있는 그런 왕자님이었다.
그리고 난 또 무언가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 .. 예뻐 “
” 어? “
“ 달이.. 예뻐 ”
정말 예뻤으니까, 나의 달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동화 속 같은 지금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아니 차라리 이곳에 갇혀 영원하기를 바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