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한 번 해 봐, 프로듀싱

[1화] 내가 플레이브의 프로듀서가 됐다고?

처음 제안을 받고선 어리둥절했다.

 

"전 여자아이돌 프로듀싱밖에 안해봤는데요."

 

소속사 측의 답변은, 

어쨌든 내가 프로듀싱한 곡들이 하나같이 잘됐고,

플레이브의 다음 앨범이 섬세한 곡 위주라 

내 감성이 꼭 필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그룹 내 맏형들인 예준, 노아가 나를 픽했단다.

 


 

그래서 지금 여기 와 있는 거겠지.

플레이브 멤버들과 소속사 직원들까지 열댓명이 모인 회식자리에.

 

"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안해주셔도 되는데..."

 

외부 프로듀서 한 명 왔다고 열댓명이 모여 고깃집 회식이라니.

나와 주로 커뮤니케이션하던 여직원 소희씨가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무슨 소리세요! 저희가 수락해 주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김보민 프로듀서님이라니..."

 

그 뒤로 한참동안 이어진 소희씨의 띄워주는 멘트를 

멋쩍은 웃음과 함께 흘려보냈다.

그냥 돈 벌러 온 직장인이죠 뭐. 하는 말은 속으로 꾹 삼킨 채.

 

딱딱한 비즈니스 이야기 위주로 흘러가던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어

어느새 주변에 주취자가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으아! 보민 프로듀서님! 진짜, 플레이브 코인 타시는 겁니다!

프로듀서님도 잘 나가시지만! 저희 멤버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본인을 주호라고 소개했던 목소리 큰 남직원의 아슬아슬한 

멘트가 시작되자 소희씨가 달려들어 그 입을 막았다.

 

"아잇...! 취했으면 집에 가...! 취했네, 취했어. 

죄송해요 보민 프로듀서님."

 

이게 회식이지. 

회사 생활 5년을 했지만 어느 회사나 회식자리는 똑같구나.

말이 프로듀서지 직장인이나 다름없었다.

대형 엔터에서 회사가 좋아하는 노래만 

충성을 다해 만든 세월이 5년이니.

 

홀로서기를 한 지금도 사회 생활이 몸에 배어

술자리에 동요되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완벽하게 미온적인 태도가 가능하다.

 

여기서 내 반응에 따라 주호씨가 외부 프로듀서 앞에서 

망언한 이미지가 되느냐,

그냥 한 순간의 헤프닝으로 끝날 것이냐가 달려있겠지.

 

"타볼게요. 플레이브 코인."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술을 들이키는 내 모습에 

소희씨는 안심했다.

이걸로 주호씨의 주사는 가벼운 술자리 헤프닝으로 끝난 셈이다.

나는 이런 농담에 관용적인 사람이 되고.

 

주호씨를 포함한 몇 명의 직원들이 가정을 지킨다며 돌아가고,

유난히 술이 약해 보이던 밤비라는 멤버는

몇 마디 못 해본 채 얼굴이 시뻘개져서 집에 갔다고 했고...

 

그렇게 군데군데 이 빠진 듯 자리가 휑해져가던 그 순간,

혼자 맥주를 따르던 내 병을, 맞은편 누군가 집어들었다.

남색 머리 멤버. 남예준이라고 했던가.

 

"왜 혼자 드세요."

 

씩 웃으며 내 잔에 맥주를 채워주는데,

첫번째로 놀란 건 분명 꽤 많이 마신 걸 봤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방송으로 봤던 것보다 목소리가 더 좋았다는 것?

 

"아, 예준씨, 반가어요."

 

나도 모르게 발음이 새버렸다.

한껏 멋있는 척, 여유로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는데.

시작부터 도수 센 걸로 달렸지 참. 눈치 못 챘겠지?

 

"어, 그만 드셔야 할 것 같은데."

 

눈치 챘구나. 따르던 맥주병을 확 멈추더니 

날 보고 씩 웃어 보인다.

 

"푸흐... 아니에요. 조절하고 있어요."

 

다시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했지만, 별 소용 없는 듯 했다.

 

내 상태를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제가 마실게요."

"아니...!"

"저 마시고 싶은데 맥주가 없어서. 진짜로."

 

어느새 내 잔에 있던 맥주들은 그의 잔으로 흘러 들어가고,

대신 내 잔에는 사이다가 채워져 있었다.

 

"짠해요 짠"

 

그 사람 좋은 미소에 홀린듯이 짠을 하고 사이다를 원샷했다.

만족스러운듯이 '흐흐흐' 웃어보이는데, 

유난히 낮은 웃음소리가 귀에 꽂혔다.

 

"말할 땐 톤이 높은데 웃을 때 확 낮아지시네요?"

 

뜬금없는 직업병스러운 발언에 살짝 당황한 듯한 그가,

이내 일 얘긴 환영이라는 듯 씩 웃으며 답했다.

 

"네, 저 저음도 가능해요."

"몇 옥타브까지요?"

"음... 어디까지 필요하신데요?"

 

내 질문 공세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극저음 파트를 하나 넣고 싶었는데

노아님, 하민님만 생각했거든요.

예준님은 워낙 노래할 때 높게 예쁜 소리만 나셔서..."

"저 극저음 부른 거 있어요! 저희 노래 중에."

 

그는 그 길로 휴대폰을 들고 쪼르르 내 옆에 와 앉더니,

'사랑한다고 말해줘, 날 혼자 두지 마'

하는 부분을 들려주었다.

 

"이게 예준님이라고요? 진짜 낮..."

 

나도 모르게 옆을 보며 말하다 멈칫해버렸다.

 

그의 볼에 입 맞출 듯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시끄러운 술집 안, 내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휴대폰과 본인 얼굴까지 딱 붙이고 있던 탓이었다.

 

"그쵸? 이거 제 목소리..."

 

신난 그 역시 나를 돌아봤다.

서로의 숨결에 실린 알콜 향까지 느껴지는 거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면, 그도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멀어졌다.

 

그 순간,

 

"뭐 들어요?"

 

우리 둘 사이에 있는 휴대폰을, 누군가의 손이 등장해 집어갔다.

진한 향수 냄새와 핸드크림 향이 코끝을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면, 뱀파이어 같이 하얀 남자, 한노아였다.

살짝 취한 듯 양 볼이 상기되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살짝 기분이 좋은 듯 했다.

 

"프로듀서님한테 내 저음 들려드리고 있었어."

"와, 남예준, 지 혼자 잘 보일라고!"

"저음 파트 다 저 주세요."

"와 진짜 레드아이즈."

 

대충 봐도 함께 한 수년의 세월이 보이는,

둘의 쉴틈 없는 티키타카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웃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노아님은요? 어떤 스타일의 곡이 좋아요?"

 

"어떤 스타일의 곡...?"

 

내 질문을 곱씹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데,

답을 떠올리느라 던진 의미 없는 시선임은 알지만 

파란 눈이 사람 홀리기에 제격인 듯 했다.

이래서 팬들이 공주공주 하는구만.

 

"프로듀서님 같은 스타일?"

"야, '곡'을 붙여야지. 중의적이잖아 지금."

 

예준 말이 맞았다. 갑자기 씩 웃으며 던진 노아의 멘트에 

오해할 뻔 한 건 사실이니까.

셋이 동갑이란 걸 알게 된 우리는 

음악과 프로듀싱이라는 공감대로 금세 친해졌다.

문득 그들이 보유한 데모곡이 궁금해진 난...

 

"꼭 제 데모를 써야하는 건 아니니까, 

두 분 작업하신 데모도 들어보고 싶어요."

 

본격적인 작업 시작 전에만 들어보고 싶다는 의미였는데 

예준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렸나보다.

 

"지금 가실래요?"

"어딜요?"
"제 작업실에요."

"네?"

"들려드릴게요 데모곡."

 

휴대폰을 보니 현재시간 0시 5분.

자정이 넘었는데 당신 작업실에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