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한 번 해 봐, 프로듀싱

[2화] 전남친에게 온 문자를 남예준이 봤을 때

(본편에 등장하는 OST 입니다. 재생하고 보시길 추천드려요)

 


 

아티스트들은 원래 이런 건가?

자정 넘은 시간이라도, 밀폐된 녹음실이라도

데모곡을 들려주기 위해서라면 상관 없는?

아님 내가 너무 보수적이고 음흉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 싶다.

 

눈 앞에 남색 머리, 노란 머리를 한 남자 둘이서

오직 데모곡 들려줄 생각에 신이 나

작업실 문을 열어 젖히는 것을 보니.

 

단 둘이 가자는 게 아니라...

그냥 데모곡이 빨리 들려주고 싶었구나. 

난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여기 앉으세요."

 

예준이 제일 좋은 의자를 내어주며 

내가 앉을 자리를 탈탈 털어주는 모습에서

'다정이 몸에 배었구나' 생각한 것 같다.

 

노아는 데모곡 소개를 예준에게 맡기려는 듯

자연스레 작업실 뒤쪽 소파로 가 편한 자세로,

아니, 불량스럽다고까지 느껴질만큼 구부정한 자세로

털썩-하고 앉았다.

 

"다 편하게 만지셔도 돼요. 프로듀서님은 더 좋은 믹서 쓰시죠?"

 

사람 좋은 미소, 겸손한 화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남예준이란 사람은 사회생활 만렙이구나.

 

"저도 비슷해요. 오늘은 들려주시는대로 들을게요.

이번 앨범은 어떤 컨셉이에요?"

 

"음..."

 

예준은 최대한 한 번에 잘 설명하고 싶은 듯,

한 순간에 진지해진 표정으로 데모곡을 찾기 시작했다.

 

"엄청 설레는 사랑 노래를 하고 싶은데,

제가 그때 딱 프로듀서님 I wish 를 들었거든요."

"아."

 

I wish 는 홀로서기 후 처음으로 작업한

여자 아이돌 '마이베일'의 데뷔곡이다.

데뷔 2주만에 음악방송 1위를 거머쥐고

많은 챌린지들을 양산해주어 나에게도 효자곡인.

 

"그건 너무 소녀 감성인데, 남돌 버전으로 원하시는 거죠?"

"아뇨. 딱 그 감성이요."

"음... 팬송 느낌 원하시는 거 아니에요?"

"팬송보다 좀 더 나아가서, 진짜 플리랑 저희랑

연애하는 것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아예 여자아이돌 감성도 괜찮겠다 생각한 거예요."

"일단 데모 들어볼게요. I wish 듣기 전에

작업하신 방향성이 있을테니까."

 

"저 좀 떨리는데요?"

 

타닥타닥-

예준의 손이 능숙하게 데모곡을 찾아냈다.

나도 작업할 때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손이 안 보이네.

 

그렇게 데모곡을 하나 둘 들으니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폴더명이 'plli_love'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 팬송에, 혹은 팬들에게 진심이구나.

 

"안무 하실 거죠?"

"네, 기존 데모 중에는 안무 붙일만한 러브송이 없어요.

확 발라드거나, 확 강한 댄스거나.

그래서 여자 프로듀서님을 모셔보자고 한 거예요 제가."

"한 번 부스 들어가 보실래요?"

 

"네?"

 

다짜고짜 녹음 부스로 들어가란 내 말에

예준은 조금 당황한 듯 했다. 아니 많이.

눈이 엄청 크구나. 꼭 토끼 같네.

 

"크하하, 남예준. 취중녹음 하는 거야 오늘?"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노아가

재밌다는 듯 어느새 우리 뒤에 와 섰다.

인기척보다 술냄새로 먼저 알아채긴 했지만.

 

"노아님도 불러보시면 어때요?"

"프로듀서님이 원하시면 해야죠. 예준이 끝나고 들어가겠습니다."

 

묘하게 뺀질거리는 말투였지만

언제든 녹음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뭐 불러요 저희?"

"I Wish요. 남자 버전 있거든요.

예준님 I Wish 들으면 아이디어가 좀 떠오를 거 같아요."

"술 마시고 녹음한 적은 없는데..."

 

예준은 잠시간 안절부절하더니,

이내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그냥 러프하게 불러볼게요. 본 녹음 땐 더 잘할 거예요."

 

거대한 덩치로 안에서 안절부절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네, 철저하게 톤만 들을게요."

 

토크백을 누른 채 웃으며 답하는 내 모습에 안심한 듯,

예준은 그제야 I wish 남자 가이드 버전을 흥얼거리며

연습하기 시작했다.

 

"갈까요?"

"I wish, I wish... 네, 가보겠습니다."

"본녹음 아니니 편하게 들려주세요."

 

예준의 노래가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놀랐는데,

첫번째 이유는 예준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취한 줄 알았던 노아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잘생겨서 간과했는데 둘 다 프로듀서 맞구나.

예준의 I wish가 계속될수록 그저 황홀했다.

 

처음 만들었을 당시 곡의 주인공이 정해지지 않아

남녀 가이드 버전을 모두 만들어 두었는데,

사실 남자 가이드 버전을 좀 더 편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남색 머리 남자가 그걸 단숨에 압도했다.

음정, 박자, 애드리브까지 완벽하게 불러가면서.

 


 

"프로듀서님...?"

 

그의 목소리에 푹 빠져 노래가 끝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부스 안에서 날 부르는 예준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오셔도 돼요!"

 

내 말에도 예준은 고개를 갸웃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오셔도 된다니ㄲ..."

 

그때 내 뒤에 서 있던 노아가 내 뒤로 훅 다가왔다.

 

"토크백."

 

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차디찬 노아의 손이

콘솔 위 내 손을 스쳐 지나갔다.

토크백 누르는 것도 깜빡하다니. 민망했다.

정확히는 백허그 자세 때문에 더더욱.


노아가 뒤에서 토크백을 눌러주고 있는 상태로,

애써 덤덤한 척 예준을 불러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오셔도 돼요."

 

내 말이 끝나자 노아가 그제야

토크백 위에서 손가락을 떼고 나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다시 누를 걸 그랬나?

그치만 굳이 손을 쳐내는 거 같아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별 쓸 데 없는 생각이 다 들던 찰나,

예준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부스 밖으로 나왔다.

 

"어떠셨어요?"

"너무 좋으셨나봐. 토크백도 안 누르고 말씀하셔."

"아 진짜로?ㅎㅎ"

 

방금 했던 생각 다 취소.

노란 머리 남자가 작정한 듯 놀리며 깔깔대기 시작했다.

저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얄미워 보일 수 있다니.

 

"장난 장난, 저 들어갈까요 이제?"

"네 그러시죠."

 

일부러 토크백을 누르고 말하는 내 모습에

노아와 예준이 동시에 주저앉았다.

 

"프로듀서님 너무 웃겨 진짜로."

"죄송해요 이 친구가 지금 취해서 그래요."

"아냐, 나 토크백 눌러드린 것 밖에 없어."

"들어가시라니까요?"

 

한 번 더 토크백 누르고 답하는 팬서비스에

노아가 녹음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웃음 장벽이... 없구나.


예준은 그저 바닥을 구르는 노아가 익숙한 듯

아빠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곁눈질로 내 기분이 어떨지까지 살피면서.

 

내가 이 정도는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웃어보이자

그제야 안심한 예준이 노아를 살살 달래

녹음실로 들여보냈다. 이래서 리더구나.

 

노아가 부스 안으로 들어가고, 예준이 내 옆에 앉았다.

 

"저 진짜 괜찮았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요?"

 

예준이 예상치 못한 답변에 헉-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긴장한듯 침을 꿀꺽 삼켰다.

 

"황홀했어요. 노래 예준님한테 넘기고 싶을만큼."

 

돌려 말하는 건 잘 못하는 타입이라

느낀 감상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3단 표정 변화를 눈 앞에서 목격했다.

긴장 > 이해 > 환희

 

덩치에 안 맞게 귀엽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예준 앞에 놓여져 있던 내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곁눈질로 살짝 내용만 확인하는데,

순간, 확인도 하지 말 걸-하고 후회했다.

 

[연락 줘 누나.

팬들한테 열애설 터뜨려서 엿 먹이기 전에.

010-2XXX-1XXX]

 

내가 5년 다닌 대형 엔터를 퇴사한 이유이자

지금도 손이 벌벌 떨릴만큼 나를 힘들게 한 존재.

 

번호를 바꿔도 의미 없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우리 관계는 아무도 몰랐기에

그가 전 프로듀서 연락처를 묻는 건 

이상한 그림이 아니었을 테니까.

 

애써 모른 척 노아의 녹음을 진행하려는데,

유리에 예준의 표정이 비쳤다.

 

 

아무래도 문자 내용을 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