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도용 ×

"어... 안녕."
"비켜."
방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대뜸 전정국의 상판대기였다. 얘가 왜? 지금 내 기분은 누군가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것도 그 무리라면 더욱더.
"밥은."
"방금 먹고 나온 거야."
"아... 뭐 먹었···"
"한수ㅈ... 뭐야, 정국이 네가 왜?"
"형...?"
전정국은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 쳐다봤다. 왜 민윤기가 내 방에서 나오는 건지 궁금한 거겠지.
"비켜. 갈 거니까."
수지는 전정국을 지나쳐 가버렸다. 민윤기는 여주를 따라가지 않았다. 더 이상 따라갔다간 더욱 화를 돋구을 거 같았으니까.
전정국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물어보지 않고 수지를 따라갔다. 민윤기의 표정도 좋지 않았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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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따라 오는데."
"아니 그냥... 할 것도 없어서."
"이여주랑 놀던가;"
"걔랑 놀기 싫은데."
얘는 또 왜 이러나 싶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내게서 지켜내던 너의 공주님이 아니었던가.
"됐으니까, 꺼져."
"...미안해."
"...?"
뭐야; 얘가 대뜸 사과를 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사과받을 일이 생기지 않았던 거 같은데, 분명히.
"내 생각만 한 거 같네..."
이상하다. 넌 늘 네 생각만 했는데...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내 생각을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얘기해? 네가 왜?
"넌 늘 네 생각만 했어."

"...나는 그냥.."
"....."
"나도 모르겠어."
진짜 짜증 난다. 얘가 원래 이런 애였을까. 지금 내게 보이는 풀이 죽은 모습은 전정국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자존심 센 녀석 아니었니?
"요즘 내 머릿속이 이상해... 내 감정도..."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아. 내 의지는 없이..."
"...!"
순간 움찔했다. 설마 전정국도... 나처럼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근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
"지금 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이거 하라, 저거 하라 난리 치고 있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무슨 말이길래 뜸 들이는 걸까. 왜인지 불안함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 걸까.

"...너랑 있고 싶다는 거야."
자신도 이게 아니라는 걸 아는 걸까. 전정국은 수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전정국의 말에 수지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져 갔다.
"미쳤어?"
그래 너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네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뱉겠어? 그것도 한수지한테?
뭔가 꼬여도 제대로 꼬인 것 같아. 어떻게 전정국이...
"난 너를..."

"야..."
"....."
"적당히 해. 너 지금도 네 생각만 하고 있잖아."
이로 꽉 문 입술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이기적인 자신이 싫어져 갔다. 당장이라도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수지의 모습에 이렇라도 붙잡고 싶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내가 왜 너를...
"...미안."
전정국은 빠르게 자리를 떠버리는 여주를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나라도 이제 와서 이러는 내가 병신 같은데, 수지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어이없을지 뻔하니까.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이게 된 걸까.."
.
.
.
.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고, 그냥 정원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정원에는 다행히도 밖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벤치에 앉았고, 생각에 잠겼다.
난 최근 들어 전정국이 이여주랑 붙어 있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그냥 사정이 있겠거니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데 나랑 아무 상관이 없던 게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전정국의 시선이 이여주가 아닌 내게 향해 있으니 딩환스러울 수밖에... 내 목표는 그 8명과 엮이지 않고, 그 남자에게서 살아남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목표를 이루는데, 문제가 생길 거 같다. 나는 출발선을 지난지 한참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출발선을 밟은 거뿐이었던 거 같다. 난 앞으로 어떻게 달려가야 되는 걸까.
"정 선생, 그 소문 들었어?"
"뭐요?"
정원에 혼자 있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진이가 수지랑 파혼했잖아요. 그래서 남준이 여동생이랑 다시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남준이한테 여동생이 있었어요...?"
"모르셨어요? 뭐, 워낙 그 애를 숨기긴 한다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기척을 숨기게 되었다. 김석진이... 약혼을 또 한다고? 그것도 상대가 김남준 여동생...? 뭔가 쎄함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지...?
꼴에 전 약혼녀라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솔직히 집안으로 따지면 수지네가..."
"수지 성격 알잖아요. 어른들도 감당 못하는데, 어느 누가 결혼을 수지랑 하고 싶겠어요?"

"....."
아니 시벌 학생 뒷담을 까고 지럴이여?
"그래도 집안만큼은 제일일 텐데."
"남준이네도 괜찮죠, 뭐. 경찰청장 딸이라는데."
이건 또 몰랐네. 김남준 아버지가 경찰청창인 건. 어째 선생들이 더 이런 거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석진이 요즘 어때요?"
"아... 똑같죠. 공부를 하던 애가 갑자기 안 하고 있으니..."
"수지 때문이에요?"
"글쎄요. 학생들 사이 소문으로는 수지를 못 잊었다나..."
하... 아무래도 김석진이 수지에게 미련이 남아도 너무 남은 것 같다. 근데 쟤도 참 이상해. 김석진 이여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 나보고 이여주 좀 그만 괴롭히라고 화낸 게 걔였잖아.
도대체 김석진은 무슨 생각인 걸까.
"슬슬 시간 됐네요. 가죠."
"그래요."

"전정국도 그렇고... 마음에 안 드네 진짜."
늘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감정마저 내가 관여할 수 없어. 이 감정은 내 감정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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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