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억해, 너만 빼고

잊혀진 대화 / 그리고 편지 한 장

태산은 요즘 말수가 줄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웃어주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걸려 있었다.

 

“요즘도… 꿈 꾸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같은 사람이 나와요.

근데, 얼굴이 안 보여요.

그런데 이상하게… 감정은 또렷해요.”

 

나는 숨을 참았다.

그게 나란 걸 말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슬퍼요?”

작게 물었다.

 

태산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blip | 태산 배경화면 모음

 

그리고,

내 쪽을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버려진 느낌이에요.”

 

심장이 천천히 쪼그라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마 내 상상 속 소리였겠지.

그래도 그건 정확했다.

 

나는,

그를 지운 장본인이니까.

 

며칠 뒤,

태산에게서 연락이 왔다.

문자였다.

 

짧고, 의미심장했다.

 

“하윤 씨, 혹시… 예전에 편지 같은 거 쓴 적 있어요?”

 

나는 손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혹시"가 아니고

"정확히 그 편지"가 뭔지 나는 알고 있었다.

 

 

 

 

 

 

 

 

blip | 태산 사진 모음

 

그날 밤.

우리는 마주 앉았다.

 

카페 구석 자리.

조명이 어둡고, 음악은 조용했다.

눈빛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그런 분위기였다.

 

태산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접혀 있었고, 구겨져 있었다.

 

"이거, 제 연습복 가방 속에서 나왔어요.

오래된 종이인데… 손글씨고."

 

나는 알아봤다.

내 필체.

 

아주 오래전,

기억을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썼던 그 편지였다.

 

“넌 아마 이걸 다시는 못 보겠지만,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건 벌일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했어.”

 

태산은 한참을 나를 바라봤다.

“…하윤 씨가 쓴 거 맞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그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놀람도, 분노도 아닌

상처받은 사람의 목소리.

 

“그냥, 비슷한 글씨체일 수도 있고…”

 

“아니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그가 내 말을 끊었다.

 

“계속 익숙하다고 느꼈어요.

당신이 나를 잘 안다는 것도,

내가 모르는 대답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도.

 

근데… 이건 뭐예요?

왜 제 가방 속에 이런 게 들어 있어요?

 

왜 저한테서…

왜 제 기억에서,

당신이 빠져 있는 것 같죠?”

 

나는 숨을 삼켰다.

 

이건,

말해선 안 되는 선.

 

하지만 이미, 선은 지워지고 있었다.

 

"태산 씨."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그 편지…

내가 쓴 게 맞아요."

 

그 순간,

공기마저도 정지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