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억해, 너만 빼고

기억의 틈 / 네가 모르는 우리의 이야기

비가 그친 거리에는

축축한 공기와 햇빛이 엉겨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접고도 한참을 걸었다.

태산은 자주 길을 잃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따라와 주었다.

 

“여기 처음 와보는데 좋네요.”

그는 나란히 앉은 벤치에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런 길을 혼자 걸었을까, 나.”

 

나는 그 말이 그저 독백인 줄 알았다.

근데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근데... 왠지 예전에 와 본 것 같아요.”

 

심장이 움찔했다.

 

그건 우리가

예전에 자주 오던 공원이었으니까.

 

우리만 알던 작은 공간,

고백도, 다툼도, 눈물도 있었던 곳.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나.

그의 기억을 너무 성급히 건드리는 건 아닐까.

 

“기억이… 잘 안 나세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뭔가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이런 느낌, 낯설지 않아서.”

 

말을 다 잇지 못하는 사람.

말의 끝이 자꾸 사라지는 사람.

 

그게 지금의 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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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나는 또 우연한 척, 연습실 근처 카페에 있었다.

 

그가 들어왔다.

검은 티셔츠에 땀이 조금 젖어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하윤 씨.”

 

그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순간, 바보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대답도 잊고 웃었다.

 

“…커피 드세요?”

 

“아니요. 그냥… 이 근처 자주 오시니까 혹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숨 멎을 뻔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나… 이상해요.”

그는 말없이 앉았다.

창밖을 보고, 손가락으로 유리컵의 물방울을 따라 그리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꿔요.

누가 날 부르는데, 목소리는 기억 안 나고…

그 사람 눈을 보면 너무 슬퍼서 미칠 것 같은 그런 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컵에 손을 얹었다.

아무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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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던 날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

나는 자취방에서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그 속에는 우리 둘만의 사진들이 있었다.

아직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

 

그 속의 태산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그 웃음은 없다.

 

사진 뒤에,

내가 쓴 낙서 하나.

 

“혹시라도,

네가 다시 날 사랑하게 되면 그건 기억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으면 좋겠어.”

 

다음날,

태산은 갑자기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내 번호를 저장한 적이 없는데…?)

 

"하윤 씨."

 

"응?"

 

"...꿈에서 봤어요.

내가 울고 있었고…

당신이 나한테 '기억 못 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말, 너무 따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