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은 요즘
하윤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입을 두 번은 열었다 닫는다.
말을 꺼내기 전에,
마음이 먼저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요즘 꿈을 꾸면… 자꾸 손이 떨려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꿈에서 제가 누굴 놓쳐요.
그 사람 얼굴이 잘 안 보여요.
근데 손이 작고… 따뜻했고…"
그는 말을 멈췄다.
"…익숙했어요. 당신 손이랑."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말도, 웃음도, 다 가짜 같았다.
기억이 다 돌아오면,
이 따뜻함도 결국 사라질까 봐.
그날 밤
태산은 꿈을 꿨다.
현관문 앞.
누군가 울고 있다.
그는 문을 열 수 없다.
울음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괜찮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기억 없이라도.”
그는 갑자기 숨이 막혀 깨버렸다.
손엔 식은 땀.
눈물 자국.
그 목소리가… 하윤이었다.
다음 날
태산은 하윤을 만났다.
"꿈 꿨어요."
그는 말했다.
"이번엔 목소리가 들렸어요.
…당신 목소리였어요."
하윤은 웃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다고 했어요.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런 말…
현실에서도 했던 적 있나요?”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니요.
한 적 없어요.”
거짓말이었다.
그건 그가 기억을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며칠 후.
태산은 다이어리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된 공용 연습실 안,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손이 갔다.
그 다이어리는 낙서투성이였다.
중간에 한 페이지.
“2024년 6월 14일
오늘 태산이 힘들어했다.
내가 옆에 있어주는 게 맞는 걸까?
그가 날 몰랐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할 텐데.”
펜 자국은 번져 있었고
손때가 많이 묻은 종이.
그는 그대로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빠르게 지나갔다.
익숙한 글씨체.
이름 없이 쓰인, 너무 정확한 감정.
"…당신이 쓴 거 아니에요?"
그가 하윤에게 물었다.
직감이었다.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런 감정… 느껴본 적 있어요?"
그렇게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계속 그래요.
당신이 나를 아는 것 같고,
나도 당신을 알았던 것 같은데
모든 게 새로워요.
그게 이상하고,
가끔… 무서워요."
하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억은 없어도,
감정이 남아 있는 건가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그 안에 떠오르는 장면 하나.
자신이 울고 있었고,
누군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하고 있었다.
“다음 생에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땐 잊지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