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억해, 너만 빼고

시간의 끝 / 다시 널 지울 수 있을까

태산은 혼자였다.

 

연습실,

불 꺼진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 문장만 속으로 반복했다.

 

“기억났어.”

 

그 문장이 조용히 자신 안에서 맴돌았다.

조각처럼 떠오르던 감정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국 한 사람에게 도달했다.

 

하윤.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기록 속

"하윤"이라는 이름을 눌렀다가,

취소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그날의 감정도 같이 돌아왔다.

 

그를 울렸던 날들,

그녀를 떠나게 만들었던 이유,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시간, 하윤은 전혀 다른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망설였다.

백 번쯤 마음을 바꿨다가,

결국 오늘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의 진심.

태산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고도 곁에 머무른 이유.

 

다시 다가간 것도,

다시 마음이 간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 모든 걸 말하겠다고.

 

저녁.

하윤이 먼저 도착했다.

 

카페.

작은 자리.

서로 처음 만났던 장소.

 

태산은 조금 늦었다.

하지만 하윤은 불평하지 않았다.

 

 

 

 

 

 

 

 

 

이미지

 

오늘은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태산아."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오늘 말하려고 왔어.”

 

그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하윤은 몰랐다.

그는 이미 다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처음부터 다 알면서 아무 말도 안 했던 거,

너무 미안해.”

 

“네가 기억 못하는 거 알면서도

계속 곁에 있었던 거,

이기적인 거였어.”

 

“근데 그만큼,

내가 너를… 진심으로—”

 

“알아.”

태산이 말했다.

짧고 낮은 목소리였다.

 

“……응?”

 

“나 이제, 다 기억났어.”

 

하윤은 그 자리에 멈췄다.

숨도 잊었다.

 

“기억… 다 났다고?”

 

“언제부터?”

 

“며칠 됐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 아니었더라고.”

 

“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기억이 난 순간,

무서웠어.”

 

하윤의 눈빛이 무너졌다.

말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이 뭔지 너무 잘 알아서.

 

"무서웠다는 게…

내가 다시 널 떠날까 봐?"

 

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면,

기억이 돌아와도

내가 여전히 널 사랑할까 봐?"

 

"……"

 

“그게 더 무서운 거잖아.”

 

하윤의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

 

 

 

 

 

 

 

 

이미지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억을 지우고도

당신을 잊을 수 없었고,

기억이 돌아와도

당신을 원망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잔인했다.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눈물이 먼저 반응했다.

 

"그럼… 나,

어떻게 해야 돼?"

 

태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말보다 감정이 빨랐다.

 

"기억나도 괜찮아.

나…

그 말 아직도 할 수 있어."

 

“너,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근데 이제는,

그게 더 아파.”